2010 남아공 월드컵에는 또 하나의 승리자가 있었다. 그것은 스페인도 네덜란드도, 그리고 부부젤라도 아닌 ‘파울(Paul)’이었다.

반칙을 뜻하는 파울(Foul)이 아닌, 독일의 ‘점쟁이 문어’ 파울 얘기다. ‘특별히 예언을 하려고 하라(고전 14:1)’던 사도 바울과 이름도 같은 이 예언가 문어는 월드컵 7경기와 스페인 대 네덜란드의 결승전 결과까지 정확히 ‘예언’해 메시(아르헨티나)와 호날두(포르투갈) 같은 스타들까지 가뿐히 제치고 월드컵 최고의 스타 중 하나로 떠올랐다. 수명이 6개월여밖에 남지 않아 파울은 예언을 그치겠지만, 또다른 ‘파울’이 다음 월드컵 때 혜성처럼 나타나리라 ‘점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바야흐로 점(占)의 ‘전성시대’다. 서울 종로나 강남역, 고속터미널 등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장소에는 어김없이 ‘점집’이 집단 성행한다. 수요가 없으면 공급도 없는 법인데, 주요 지하철역마다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사람들은 앞일을 궁금해하고, 알고 싶어한다. 사회가 발전할수록, 과학이 첨단을 향해 달릴수록 점집이 늘어나는 현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창조론’은 비과학적이라며 믿지 않으면서, 점은 왜 볼까

▲점쟁이 문어 ‘파울’이 결승전 승자로 네덜란드가 아닌 스페인을 지목한 장면. 김충렬 교수는 이번 점쟁이 문어의 신통력(?)에 대해 “이미 각 나라별로 축구 실력은 다 나와있지 않았나”라며 “문어가 신통력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데 말도 안 되는 얘기이고, 잘은 모르지만 뭔가 장치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점’의 사전적 의미는, ‘팔괘·육효·오행 따위를 살펴 과거를 알아맞히거나, 앞날의 운수·길흉 따위를 미리 판단하는 일’이다. 여기서 팔괘는 중국 상고 시대 복희씨가 지었다는 여덟 가지의 괘로, <주역>에서 세상의 모든 현상을 음양을 겹쳐 여덟 가지 상으로 나타낸 것을 이른다. 결국 점이란 어떤 현상, 예를 들면 그 사람의 생년월일 등을 보고 앞일을 판단하는 행위다. 여기에는 몇천 년간 쌓이고 쌓인 통계 자료가 이용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점에는 다양한 기능이 있다. 먼저 모르는 것을 알고 싶은 본능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그것이 자신이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집단의 운명과 관련되면 더 강한 호기심이 유발된다. 여기에 모르는 것에서 오는 막연한 불안을 해소시킨다. 수많은 변수들이 도사리고 있어 자신이 도저히 제어할 수도 없고 인지할 수도 없는 미래에 대해 점이 맞든 틀리든 어느 정도 인식하면서 불안과 초조감이 상당 부분 상쇄된다.

통제할 수 없는 미래이지만, 그 미래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소망도 점집으로 달려가는 이유가 된다. 소위 ‘점쟁이’들은 보통 점을 치면서 나쁜 운명을 물리치고 복을 끌어들이는 방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해가 되면 사람들은 ‘운수대통’을 위해 토정비결을 본다. 이렇게 점을 치는 데는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우연’이라는 존재에 대한 반감도 섞여있다.

‘점괘’가 나쁠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사람들은 지레 포기하기보다는 더욱 분발하고 노력하는 경우가 많다. ‘점’과는 상관없지만, 구약성경에서 “니느웨가 멸망한다”고 외쳐 그곳 주민들을 변화시킨 요나의 예언이 이러한 기능을 수행한 대표적 예다. 길(吉)한 결과가 나오면 더 자신감을 갖고 어떤 일을 추진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무언가에 의존하고 싶은 사람들의 ‘연약성’도 발견된다. 일이 잘못됐을 때 운명론적으로 책임을 회피할 ‘장치’로도 기능할 수 있고, 자신의 운명을 자신이 개척해가야 하는 ‘선택’에 대한 부담을 다소나마 떨쳐낼 기회도 된다.

최근에는 재미나 오락을 위해 점을 치는 사람들이 많다.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타로나 사주카페, 별자리나 ‘오늘의 운세’ 등은 재미의 요소도 없지 않다. ‘점쟁이 문어’의 예에서 보듯 미래를 예측한다는 점에서 로또나 스포츠토토 같은 도박의 경우도 한편으로는 이러한 점의 일부분이다. 각종 변수가 도사리는 게임들과 결합돼 도박성, 사행성을 불러 일으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인에게 ‘점’은 생활 깊숙히 들어와 있다. 객관적인 사실을 전달한다는 각종 언론매체에 ‘오늘의 운세’는 빠지지 않는 코너 중 하나다. 상대적으로 젊은 세대들이 많이 사용하는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어플)에도 점 관련상품은 인기다. 최근 앱스토어인 삼성앱스 다운로드 수 발표에 따르면 얼굴인식 관상 앱이 압도적인 1위를 차지했다. 이 앱은 1주일만에 3만건 이상 내려받아 휴대폰 게임이 1위를 차지한 대부분 다른 나라들과 대조를 이뤘다.

종교의 역할과 맞닿은 자리… 점, 그리고 기독교의 ‘예언’

▲14일 오후 신촌 지역에 늘어서 있는 타로 점집들. 낮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적지 않았다. ⓒ이대웅 기자

점쟁이 문어는 넓은 범주에서 일종의 ‘예언가’다. 이처럼 시대가 지나도, 이러한 ‘신비적’인 면에 대한 관심은 전혀 사그라들 줄을 모른다. 위에서 살폈던 ‘점’의 기능들은 그대로 신앙적인 면에도 적용시킬 수 있다. 최근 침체에 빠진 한국교회에서 ‘예언 사역’에 대한 관심이 늘어난 점만 봐도 알 수 있다. 성경만 봐도 ‘예언자’나 ‘선지자’들이 시대마다 빠짐없이 등장한다. 구약의 절반은 ‘예언서’이고, 신약의 마지막 책도 예언서인 ‘요한계시록’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주로 하나님을 떠나 타락의 길로 나아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경고하고, 회개와 변화를 촉구했다. 예언 사역은 신약시대 이후에도 계속됐으며, 최근에도 신사도 운동과 관련된 ‘은사 종결’ 논란과 함께, “한국이 회개하지 않으면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예언이 화제가 됐다.

하지만 ‘신비주의’에 대한 위험성이 상존하는 예언 사역에 대한 우려도 없지 않다. 본지에 ‘성령론’을 연재중인 배본철 교수(성결대)는 이에 대해 “참다운 예언은 개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고, 언제나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열매를 맺는다”며 “예언에 대해 갑론을박이 심한 이유는 은사주의자들과 전통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인데, 이들 주장대로 성령의 은사를 예언이라 부르든 성령의 감동이라 부르든 예언 사역은 그동안 존중받지 못하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선교 현장 속에 다시 강력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한국상담치료연구소장인 김충렬 교수(한일장신대)는 “과학이 발달했지만 신비감을 기대하는 인간의 심리가 있고, 오히려 지식이 많은 사람일수록 그런 곳에 더 빠지는 경우가 있다”며 “이는 굉장히 합리적인 사람이 비합리적인 사실에 빠져드는 경우로, 인간의 본연에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특성과 도박의 심취 이런 면들이 우리 앞에서 항상 유혹으로 작용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풀이한다. 김 교수는 그러나 “종교가 신비감이 없으면 안 되겠지만, 그것이 지나쳐 신비주의나 인간 본성의 도박 성향에 부화뇌동해서 빠져들어선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5천만원 헌금했다가 더 큰 축복 없다며 반환 요구한 한 성도 이야기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신촌 거리에서 사주 카페들도 성업 중이다. ⓒ이대웅 기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마 6:34)”

2천년 전에도 ‘내일 일’을 염려하는 사람들은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불신자들도 알고 있는 예수님의 ‘산상수훈’ 중 유명한 한 대목은 바로 미래에 대한 과도한 걱정을 삼가라는 당부의 말씀이셨다. 염려는 불안으로, 불안은 신앙의 ‘걸림돌’로 작용해 바라는 것들의 실상(히 12:1)인 ‘믿음’으로 개척해 나가야 할 우리들의 삶을 ‘점괘’와 같은 것들로 대체해버리고 만다.

본지에 ‘도박중독’을 연재중이기도 한 김충렬 교수는 이에 대해 “인간이라면 누구나 미래를 알고 싶은 본능과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특성이 있고, 특히 도박 심리, 베팅 심리가 있다”며 “이는 크리스천이라고 예외가 될 수 없다”고 풀이했다. 특히 신앙이 약화되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묵묵히 살아가기보다는 ‘요행’을 바라기 쉽다고 덧붙였다.

김 교수는 “강한 신앙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성실함으로 이를 대응하지만, 신앙이 약한 경우 성실하지 않게 조금 일해놓고 엄청난 효과를 기대하는 일종의 ‘도박 심리’가 생긴다”며 “쉽고 재미있는 일을 하면서 좋은 결과를 기대하는 일종의 사행 심리가 점점 사회에 만연돼 걱정”이라고 우려했다. 최근 한 TV프로에서는 이와 관련, 국내 최대의 온라인 게임사이트 중 하나인 한게임 등록자가 무려 3천만명이고, 하루 접속자만 3백만명이 넘는다는 사실을 밝혀 충격을 주기도 했다.

기독교인들도 이러한 흐름과 무관하지 않다. 최근 서울 모 교회에서 한 성도가 자신이 헌금한 5천만원을 돌려달라고 한 일이 있었다. 헌금한 만큼 더 많은 축복을 기대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자 ‘본전 생각’이 났던 것. 교회는 그 성도에게 헌금을 돌려줬다고 한다. 진정한 의미의 ‘헌금‘이라 보기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문제는 이런 일이 심심찮게 들려온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기복신앙’은 결국 ‘기도 응답’이라는 신앙적이고 영적인 결과를 마치 ‘로또’처럼 여기게 만든다.

목회자들, 예언도 중요하지만 ‘성실한 삶’ 더 강조해야

▲수능을 앞두고 기도하는 학부모들의 모습. 실수하지 않게 해 달라는 기도는 가능하겠지만, 모르는 문제를 맞추게 해 달라는 기도까지 하나님께서 기뻐하실까(사진은 특정 기사와 관련이 없습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매달 ‘지성과 영성의 만남’ 대담을 진행중인 이재철 목사는 이를 “황제의 길에서의 성공”이라 정의한다. 크리스천이라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고 추구하는 요소들과 다른 가치관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사는 가정의 재물 축복이나 자녀들이 좋은 대학에 들어가는 것 등을 ‘성공의 기준’으로 여기는 세태를 거슬러 “예수의 길에서의 성공”을 추구하라고 조언한다.

목회자들은 ‘점 치는 시대’를 사는 성도들에게 ‘성실한 삶’의 중요성을 기회 있는대로 강조해야 한다. 김충렬 교수는 “크리스천들이라도 점에 쏠리고 매력이 끌리는 이유는 하나같이 자신의 삶에 충실하지 못하면서도 더 좋은 결과를 바라기 때문”이라며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도우심도 중요하지만, ‘심는대로 거둔다(갈 6:8)’는 자연의 원리를 기본적으로 가르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신앙적인’ 도움을 받는 영적인 존재들인데, 이를 자연과 양심의 원리에까지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자연과 도덕의 원리를 뛰어넘으려는 기독교인들의 이러한 행위는 불성실함의 전형”이라며 “이는 하나님께서 그가 믿든 믿지 않든 봐 주시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렇듯 신앙이 무속적으로 흘러버리면 점점 우연과 요행을 바라게 되고, 결국 낭패를 당한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며 “더 열심히 일하면서 땀흘리며 노력하는 자세를 가진 뒤에, 진인사 대천명(盡人事 待天命)의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고 전했다.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기도부터 변해야 한다. 기도(祈禱)가 주문(呪文)으로만 흘러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무턱대고 기도가 이뤄지지 않는다고 하나님을 원망하는 행위는, 마치 이번 월드컵 4강전에서 패한 독일의 축구팬들이 이를 예측한 점쟁이 문어를 잡아먹겠다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자기 합리화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다”는 핑계거리를 만들기 위한 금식기도도 필요하지만, 성실하고 진실한 삶으로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일이 먼저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