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지난 1년간 ‘배본철 교수의 세계순회 성령사역’을 연재했던 본지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의 새 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를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무엇인가’ ‘직통계시가 가능한가’ 등 성령론에 관한 많은 궁금증들을 질문(Q)과 대답(A) 형식으로 속시원히 풀어줄 예정입니다.

Q) 요즘 예언을 강조하는 집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어떤 분들은 예언의 은사가 교회 내에 반드시 회복되어야 한다고 가르치기도 합니다. 만일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이 오늘날 실행될 수 있다면 어떤 점을 유념해야 합니까?

A) 우선 오늘날의 기독교 상황은 성경의 정경화 작업이 완성되었다는 점에서 초대교회 때와는 다르다는 점을 전제해야 합니다. 이 말은 곧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이 결코 완성된 성경의 내용을 벗어나거나 왜곡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성경의 저자가 성령이신데, 같은 성령께서 성경의 정신에서 어긋나는 다른 예언의 내용을 주시겠는가 하는 말입니다. 이 점은 오늘날 예언의 은사를 강조하는 분들이 반드시 명심해야 할 부분입니다.

자, 그러면 성경에서는 이러한 예언의 은사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요? 성경에 보면 예언은 누군가를 위해서 기도할 때나 복음을 전할 때 또는 신앙상담 중에 나타날 때가 많습니다. 사도행전에서 다음과 같은 예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 예언을 말함(행 2:17), 아가보의 예언(행 12:28), 박수 엘루마가 바울의 예언으로 눈이 멂(행 13:9-11), 성령 받아 예언함(행 19:6), 빌립의 네 딸이 예언함(행 21:9-11), 배안에서 바울이 예언함(행 27:10,22-26). 그리고 바울서신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예언에 대한 교훈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언은 믿는 자들을 위한 것이요 또한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한 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4:4,22). “예언하는 자는 사람에게 말하여 덕을 세우며 권면하며 안위하는 것이요”(고전 14:3). 따라서 성도들은 예언의 나타남을 사모해야 한다고 했으며(고전 14:1,39), 결코 예언을 멸시해서는 안 된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살전 5:20).

다시 정리해 본다면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은 첫째, 성령의 능력과 관련이 있습니다. 성경적인 예언은 언제나 성령의 인도와 능력 안에서 행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복음 증거의 목적에 닿아 있습니다. 예언이 성령의 나타남(manifestation of Holy Spirit)으로서 행해질 때 복음이 권세 있게 전달되는 것을 봅니다. 셋째,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교회의 유익을 위한 것입니다. 참다운 예언은 개개인의 사리사욕이나 목적을 위해 사용될 수 없고 언제나 교회를 유익하게 하는 열매를 맺습니다.

제가 몇 해 전 안식년을 이용하여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복음사역을 할 때의 예를 들겠습니다. 선교지역에 있는 어느 교회의 집회에 초청을 받았을 때의 일입니다. 그 집회가 있던 날 새벽에 성령께서 제게 그날 집회를 통해 치유 받을 환자들이 많다고 알려주셨습니다. 그날 예배가 시작되고, 나는 설교 중에 성령의 감동을 따라 공개적으로 육체와 영혼의 치유를 선포하였습니다. 성령께서는 제 입을 통해 구체적인 질병과 고통의 목록까지도 열거하게 하셨습니다. 그날 치유 받은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습니다. 예배 후에는 그 교회 담임목사님께서 중보기도팀원들을 데리고 내게 오셨습니다. 모두 한 사람씩 기도해 주라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한 분씩 개인적으로 기도해 주었는데,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주시는 성경 구절들과 영상들이 있었습니다. 모두들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받는 놀라운 시간이었습니다. 온 교회가 그날 집회로 인해 새로운 감동과 새 힘을 얻게 되었음은 당연했습니다.

또 어느 나라의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던 마지막 날 성령의 감동을 받아 예상치도 않았던 안수기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기도 받기 원하는 분들은 모두 한 줄로 늘어서서 자기의 순서가 올 때까지 기도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무슨 기도의 말을 해야 할지에 대해 미리 생각해 둘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주시는 말씀이나 마음의 영상을 전해주면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날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필요한 성경 말씀을 분명하게 전해주길 원하셨습니다. 나는 또박또박 분명한 발음으로 각 사람에게 성경 말씀을 전달하고 또 내 마음에 주시는 영상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가 주어졌으며, 간혹 어떤 이에게는 더러운 영을 추방하는 기도가, 또 어떤 이들에게는 주님께서 주시는 소명에 대한 분명한 말씀이 주어졌습니다. 그날 집회 후 온 교회에 놀라움과 기쁨이 임했습니다.

만일 이러한 유익을 끼치는 성령의 은사를 예언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이러한 예언은 복음의 확장과 교회의 강건함을 위해서 얼마나 요청되는 무기일까요? 그런데도 기독교계에는 예언이라는 주제를 놓고 갑론을박이 심한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요? 그 근본적인 논쟁의 시발점은 예언에 대한 은사주의자들과 전통적 복음주의자들 사이의 의견 대립에서 비롯됩니다. 그런데 다행히 이들 간의 차이점은 은사의 유무(有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은사 표현상의 차이에서 나타난다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서, 똑같은 성령의 감동을 받은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사람은 은사주의자이고 또 한 사람은 전통적 복음주의자입니다. 은사주의자가 ‘성령께서 이런 예언을 주셨다’고 표현할 때, 전통적 복음주의자는 ‘주께서 이런 감동을 내 마음에 주셨다’고 표현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다만 “내용의 범위와 전달의 능력에 있어서의 차이점”(Max Turner, The Holy Spirit and Spiritual Gifts, 350)에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인 차이는 종류의 문제가 아니라 정도의 문제입니다;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강조점에 관한 것입니다”(Turner, 356).

주후 200년경 극단적인 예언을 강조하던 몬타누스주의(Montanism)가 축출되고 나자, 교회의 권위가 강화되고 성경의 정경화 작업에 박차를 가하게 된 좋은 결과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운 점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성경에 언급된 바, 성령께서 주시는 새로운 통찰에 대한 기대를 언급한 요한복음의 사상이 영향력을 잃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이제 교회 내에는 자유로운 예언자의 영(靈) 대신 계층구조체제(hierarchy)가 중심을 이루게 되었고, 마침내 예언자의 영은 종파적인 운동으로 도주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이제 예언이라고 하는 논제를 두고 은사주의와 전통적 복음주의 사이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다고 봅니다. 그것은 제가 앞에서 말한 표현과 용어상의 차이점의 문제를 서로 잘 이해해 준다면, -이러한 현상을 예언이라 부르든지 아니면 단지 성령의 감동이라고 부르든지 간에- 그동안 교회사 속에서 존중 받지 못하던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을 교회와 선교현장 속에 다시 한 번 강력하게 풀어놓을 수 있는 대단한 일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