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본철 교수(성결대학교)
지난 1년간 ‘배본철 교수의 세계순회 성령사역’을 연재했던 본지는 배본철 교수(성결대)의 새 글 ‘배본철 교수의 성령론 Q & A’를 매주 화요일 연재합니다. ‘방언이란 무엇인가’ ‘예언이란 무엇인가’ ‘직통계시가 가능한가’ 등 성령론에 관한 많은 궁금증들을 질문(Q)과 대답(A) 형식으로 속시원히 풀어줄 예정입니다.

Q) 교인 중에서도 점을 보거나 예언을 받으러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또 교회 내에 예언 때문에 문제가 많이 일어난다고도 합니다. 오늘날 기독교에도 예언이라는 것이 존재하나요? 그리고 만일 예언의 은사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인가요? 누구든지 예언을 말할 수 있는 건가요?

A) 무엇보다도 먼저 전제될 것은 성경 자체가 가장 완벽한 초시대적이며 객관적인 예언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 1:20-21).

진정한 크리스천이라면 성경 말씀이 곧 예언이라는 점에 대해서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언에 대한 논쟁을 일으킨 교회사 최초의 집단은 몬타누스주의(Montanism)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성령이 신자들에게 친히 임재하신 결과 중의 하나가 곧 특별한 새 예언을 말하게 되는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예언이란 기록된 성경과는 별도의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2세기 기독교에는 구약성경만 있을 뿐 신약성경은 아직 정경화(canonize)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교훈이라든가 사도들의 편지가 교회 내에서 입으로 전달되고 또 가르쳐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 지도자들이 받아 말하는 예언은 신약성경의 내용을 대체하는 정도의 권위를 인정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의 예언이라고 하는 것이 시한부 종말론이나 독신생활 그리고 극단적인 금욕주의를 조장하는 경향이 짙어짐으로 인해 급기야는 교회분파주의 현상을 보이게 된 것입니다. 그러자 어쩔 수 없이 정통 교회에서는 이들을 축출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점에서 16세기의 종교개혁자들은 신앙의 표준을 가톨릭 교권주의나 신비주의나 금욕주의 등을 다 물리치고 오직 성경의 권위에 중심을 두었습니다. 종교개혁자 칼빈(John Calvin)은 성령의 내적 증거에 대하여 논하면서, 성령의 사역으로 인해 하나님은 친히 성경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보았습니다; “예언자들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던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까지 뚫고 들어와 이 예언자들이 과연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명하신 바를 충실하게 선포하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확신시킨다”(기독교강요, I 7:4).

17세기의 청교도들은 성경 그 자체만으로도 신자의 삶에 있어서의 모든 요구가 충족된다고 확신하고 있었으므로, 바로 이런 점에서 내적 계시를 말하는 퀘이커교도들을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성경의 내용뿐만 아니라 단어들도 직접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참으로 청교도들에게 있어서 성령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마음의 초자연적이며 직접적인 계시’로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곧 하나님 말씀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에, 강단으로부터 외쳐지는 설교를 통해서 신자들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오늘날의 개혁주의신학에서는 바로 이런 개신교적 전통을 최대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록된 성경 이외의 어떠한 새로운 예언도 있을 수 없다는 노선을 지키고 있는 것이지요. 이러한 노선의 발표는 1909년 9월 독일에서 가진 베를린 선언(Die Berliner Erklärung)의 내용에도 잘 나타납니다. 이 선언에서 그들은 방언이나 예언 등 은사의 지속성을 강조하는 오순절운동 속에는 마귀의 역사가 활동한다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Die Berliner Erklärung’, Max Turner, The Holy Spirit and Spiritual Gifts, 347).

개혁주의신학자인 워필드(B. B. Warfield)나 개핀(Richard B. Gaffin) 같은 이도 예언 같은 특별 은사는 사도시대까지로 중지되었기 때문에 현대 교회에는 나타나지 않는다고 보았습니다(B. B. Warfield, Miracles: Yesterday and Today, Real and Counterfeit, 5-6; Richard Gaffin, Perspectives on Pentecost: New Testament Teaching on the Gift of the Holy Spirit, 144).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개혁주의신학자들도 사도직 혹은 성경 기록과 직결된 예언과 방언은 이미 끝났다고 보면서, 오늘날 행해지는 방언이나 예언 등은 성령의 역사로 나타나는 은사로 확인할 수 없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된 성경만이 예언의 전부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교회 역사상 끊임없이 제기되어 왔습니다. 특히 20세기 초의 전통 오순절운동과 1960년대의 은사갱신운동 그리고 1980년대 이후의 제 3의 물결을 거치면서 성령의 은사에 대한 관심과 추구는 그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습니다. 은사주의자들은 자주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고 확신 있게 주장하곤 합니다. 빈야드운동(Vineyard Movement)에 있어서도 예언은 그들 사역의 중요한 일부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예언을 전한다고 합니다. 이들은 가능한 한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예언을 강조하는 성령운동을 확장해 갑니다.

이처럼 현대 교계에는 예언에 대한 서로 엇갈린 견해가 충돌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개혁주의신학의 전통에 따라 예언의 은사는 이미 사도시대로 종결되었다고 보는 견해이고, 또 하나는 성령의 은사로서의 예언은 여전히 교회 내에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앞으로 더욱 활성화되어질 것으로 보는 견해입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