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개봉한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 <로빈후드>를 보면서 솔직히 그리 기분이 좋지 않았다. 13세기 영국의 부패한 기독교 성직자들, 대학살로 얼룩진 십자군전쟁, 왕권신수설을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탐욕한 국왕 등……. 리들리 스콧 감독은 왜 이런 방식으로 기독교의 치부를 들추어내면서 로빈후드를 ‘영웅’으로 치켜세우는지 불만이었다.

스콧 감독의 정확한 의도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영화를 통해 “종교 따위가 뭐 필요해? 의적 로빈후드가 고아와 가난한 사람들을 모아 만든 이 숲속 공동체가 더 아름답지 않아?”라고 묻는 것 같았다. 그저 재미있으라고 만든 일개 헐리우드 영화지만, 영화 <로빈후드>가 던지는 질문을 그냥저냥 쉬이 넘어가긴 좀 어려운 것 같다. 왜냐하면 이 질문은 리들리 스콧 감독만의 질문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그 질문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라는 인류가 지금까지 끊임없이 물어오던 보편적인 질문이기도하다. 또한 13세기 ‘종교’라는 명분 하에 일어났던 십자군 전쟁이 21세기 현재에도 유대교와 이슬람, 기독교 사이에 ‘문명의 충돌’이라는 형태로 여전히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의적 로빈후드는 사자왕 리처드를 따라 십자군전쟁에 나섰던 용병이었다.

영화에서 로빈후드 즉, ‘로빈 롱스트라이드’(러셀 크로)는 제3차 십자군전쟁을 이끌었던 영국 사자왕 리처드의 용병으로, 평민출신이지만 뛰어난 활솜씨을 가진 인물이다. 십자군전쟁은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기독교인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8회에 걸쳐 감행했던 대원정으로 잘 알려져있다.

영화는 십자군전쟁에 대해 로빈의 대사를 빌려 이렇게 평가한다. “아크네에서 죽어가던 한 무슬림 여자아이의 눈빛에 두려움은 없었다. 그리고 그 아이를 보며 이제 신의 손이 우리를 떠났음을 알게 되었다”고. 프랑스전투에서 리차드왕의 신임을 얻었던 로빈은 아크네대학살에 대한 비판으로 인해 목숨을 잃을 위기에 놓이지만, 전투 중 리처드 왕이 전사하자 영국으로 탈출을 시도한다. 로빈은 탈출하던 중, 우연히 죽어가던 노팅엄 영주의 아들 로버트 록슬리를 만나 칼을 그의 아버지 월터(막스 폰 시도)에게 전달하기로 약속한다.

고향으로 돌아온 로빈은 리처드를 이어 왕이 된 동생 존왕(오스카 아이삭)의 폭정과 부패한 정치 및 종교권력으로 인해 피폐한 민생을 목도하게 된다. 결국 존왕의 폭정을 견디지 못한 북부 귀족들은 군사들을 모아 출격하고, 프랑스는 조용히 영국을 치기 위해 영국 북부 해안에 상륙한다. 한편, 몰래 록슬리 경으로 행세하던 로빈은 월터로부터 자신의 아버지가 자유를 위해 싸우다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동료들과 함께 부패한 존왕에 맞서 싸움에 나선다.

영화 <로빈후드>는 로빈이 왜 십자군전쟁에 참여했던 전사의 이력을 버리고 숲속공동체를 형성해 의적이 되기까지 어떤 과정을 거쳤는지 자세히 설명해준다. 의적활동을 묘사하는 데 치중하던 기존의 드라마나 영화시리즈와는 약간 다른 관점인 셈이다.

사실 로빈후드는 지금까지 수많은 TV와 영화에서 재생산됐던 이야깃거리다. 실제인물인지 확실치 않지만, 뛰어난 활실력을 가졌던 그는 탐욕에 물든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의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한국엔 그와 비슷한 컨셉의 ‘홍길동’이 존재한다.

왜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소재가 끊임없이 미디어를 통해 재탕삼탕 될까.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원하고 상상하는 유토피아와 영웅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지. 로빈후드라는 영웅을 필두로 한 숲속공동체는 고아나 가난한 사람이나 누구든지 평등하게 소유를 나누며 살아가는 이상적인 공동체다. 실제 역사 가운데 이와 비슷한 이상을 꿈꾼 사람이 있었다.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표방하며 유토피아를 꿈꿨지만, 결국 그 실험은 실패로 끝이 났다. 물론 로빈후드가 감행했던 실험(?)은 마르크스에 비하면 동네 애들 장난 수준이라 둘을 비교한다는 게 조금 어폐가 있지만 말이다.

▲로빈후드에겐 수도사 친구도 있었다. 그는 양봉을 부업삼아 생계를 꾸려간다.

로빈후드의 숲속공동체나 공산주의가 근사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한계가 있다. 그것은 부자들의 재산을 ‘빼앗아’ 이상을 실현하는 ‘폭력’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 공산주의의 실험 역시 피를 부르는 거대한 숙청이라는 비극이 존재했다. 평등한 사회라는 명분이 있어도 ‘폭력’이라는 수단은 정당화하기 힘들다. 피는 피를 부르고,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결국 진실된 유토피아를 이루자면, 사랑을 기초로 한 자발적인 선행과 나눔에 기대는 수밖에 없다.

사도행전 2장에는 자발적인 나눔의 공동체였던 초대교회가 등장한다. 초대교회 교인들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던 공동체였다. 어떠한 강제적 수단 없이 자발적 의지에 따라 ‘물질적 소유’를 초월했던 위대한 공동체였던 것이다.

위대한 공동체였던 교회지만 중세시대 막대한 권력을 소유한 교회는 ‘변질’의 길을 걷게 됐다. 그리고 피폐한 생활로 인해 고통받는 백성들은 그 끝에서 문학작품을 통해 ‘로빈후드’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어냈다. 이미 지나버린 역사이지만 교회의 변질로 인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교훈은 실로 엄청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