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추양 한경직 목사.
“나는 솔직히 우리 자손들에게 남길 유산은 하나도 없다. 문자 그대로 나는 내게 속한 집 한 칸, 땅 한 평도 없는 사람이다. … 가족을 대할 때 늘 미안하다. 내가 너희들에게 남기는 것은 없지만 너희들을 위해 늘 기도하고 있다.”

고(故) 추양(秋陽) 한경직 목사(1902~2000)가 1981년 육성 테이프를 통해 가족에게 남긴 유언이다. 소천한지 어느덧 10년. 그를 잊지 못한 사람들이 18일 오후 5시 서울 저동 영락교회(담임 이철신 목사)에서 추모예배를 드렸다. 그는 여전히 가슴에 살아있었다.

교세는 약해지고, 목회자를 신뢰할 수 없다는 목소리도 들리고, 물량주의화된 교회를 질타하는 원로들도 많다. 이대로 가다간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경고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경직 목사를 찾았다.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한 성도는 “웃고 계신 사진을 보니 왠지 희망이 생기고 힘이 난다. 한 없이 편안한 웃음에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기도 한다”고 했다. 성도들은 이날 예배 중 스크린에 비친 ‘한경직 목사님은 과거가 아닙니다. 미래입니다’라는 글귀를 가슴에 새기고 돌아갔다.

올해 백세인 방지일 목사(영등포교회 원로)가 ‘긍정으로 사신 분’이라는 제목으로 설교했다. 아니, 설교라기 보다 울림에 가까웠다. 5분 남짓 전한 메시지. 그러나 그의 한 마디 한 마디는 한경직 목사와의 추억으로 짙었고 그 어느 설교보다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그 분은 항상 긍정적으로 사셨습니다. 땅을 보시지 않고 늘 하늘을 올려 보면서 ‘예’라고만 했습니다. 그와 많은 회외를 하면서 그것을 느꼈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분의 삶을 배우고 실천해야 합니다.” 침묵이 흘렀다. 성도들은 입과 귀를 닫고 대신 가슴을 열어 그의 울림을 받아들였다.

한 목사는 생전 많은 일들을 했다. 1950년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폐허가 된 민족과 교회의 재건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고 지금의 숭실대학교, 서울여자대학교, 대광 중·고등학교 등을 설립해 하나님 나라의 지도자들을 길렀다. 구호단체인 월드비전과 홀트양자회 등을 통해선 이웃들을 돌아봤고, 군대에 교회를 설립하고 군종목사를 파송해 군복음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사람들은 그런 그에게 많은 상을 안겼다. 1992년 종교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템플턴상’을 받았고, 1970년엔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1998년엔 건국공로장을 수상했다. 하지만 2000년 4월 19일 그가 주님께로 갔던 날, 남겨진 것이라곤 휠체어와 지팡이, 겨울 털모자, 그리고 즐겨쓰던 반뿔테 안경 등이 전부였다. 상은 화려했으나 삶은 초라했고, 삶은 초라했으나 영은 누구보다 부자였던 사람…….

▲많은 성도들이 예배당을 가득 메웠다. 한경직 목사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살아있었다. ⓒ 김진영 기자

그가 뿌린 씨앗이 열매로 자라 이날 영락교회를 찾았다. 숭실대학교 김대근 총장, 월드비전 박종삼 회장, 군선교연합회 사무총장 이학수 목사가 축사를 전했다. 김 총장은 “인재 양성을 바라시는 목사님의 바람이 초석이 돼 지금의 숭실대학교가 명문학교로 거듭날 수 있었다. 그 분의 뜻을 한시도 잊지 않겠다”고 했고 박 회장은 “전세계 60억 명의 인구 중 약 10억 명이 아직도 기아에 허덕이고 있다. 그 10억 명 중 1억 명을 월드비전이 돕고 있다. 목사님의 선견지명에 고개를 숙인다”고 했다. 이 목사는 “군대 교회 중 40%를 목사님과 영락교회에서 지었다”고 짧게 말했다. 그는 “말로는 더 설명할 수 없겠다”고만 했다.

예배가 끝났다. 성도들이 다시 발길을 돌린다. 집으로, 일터로, 그렇게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 부디 한경직 목사의 말을 잊지 말아야 할 텐데…….

“언제나 좌우로 치우치지 말고 성경중심대로 살아야 하는데 이는 열심은 있으나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를 잠깐 맡아서 관리하는 관리자이며 관리자는 신실하고 부지런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 그리스도의 사랑과 인내와 지혜와 덕을 배워 그리스도의 최고 인격에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를 갖고 신앙생활을 하기 바라며 전도하고 사랑을 베풀고 돕고, 좋은 사업을 하고 또 누구에게나 어디서나 선한 씨를 많이 뿌려야 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가족에게 남긴 유언 中)

다행히 돌아가는 성도들의 얼굴이 밝다. 이제 봄인데, 벌써부터 가을볕(秋陽)이 그리운 건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