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좌를 마치고 참석한 서울신대 교수진들과 이날 강좌 발제·토론자들이 기념촬영하고 있다. ⓒ이대웅 기자
‘한국 기독교 역사의 재인식’을 주제로 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소장 박명수 교수) 주최 제14회 영익기념강좌가 7일 오전 부천 소사동 서울신대 성봉기념관 강당에서 개최됐다.

이번 강좌는 구한말 한국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한 기독교에 대해 민족 감정을 자극하는 ‘내재적 발전론’ 등을 내세워 그 역사적 영향력을 축소하려는 일선 역사학자들의 주장에 대응하려는 학문적 시도라 할 수 있다. 강좌에서는 ‘한국 근대화와 기독교’를 이은선 교수(안양대), ‘초기 한미관계와 기독교의 수용’을 박명수 교수(서울신대)가 각각 발제했다. 허명섭 교수(서울신대)와 안교성 교수(장신대)는 각각 논평했다.

영익기념강좌는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설립 기본 기금을 마련한 故 김영익 집사(장충단교회)를 기념해 매년 봄 개최하는 학술강좌다. 연구소는 오는 13일 오후 7시에는 빌 버밀리언(William H. Vermillion) 국제OMS선교회 부총재를 초청, ‘국제OMS에서 웨슬리언 성결신학 교육의 최근 상황’을 주제로 제64회 정기세미나를 개최할 예정이다.

“기독교, 꿈틀거리던 조선 사회 발전의 결정적 ‘원동력’”

▲이은선 교수. ⓒ이대웅 기자
먼저 발제한 이은선 교수는 “한국의 근대화에서 기독교 역할에 대해 내재적 발전론을 주장하는 연구들은 우리나라의 내재적인 요소들을 지나치게 강조해 외부 요인들의 역할을 거의 인정하지 않은 반면, 외부적 요인들을 강조하는 입장에서는 한국의 내부적인 준비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며 “이 두 입장의 논쟁을 거쳐 얻어진 결론은 양자의 상호 작용에서 균형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이 교수에 따르면 내재적 발전론은 적어도 조선 후기는 정체되지 않고 발전하는 사회였다는 것이고, 스스로 근대화를 모색하려는 ‘선행 조건’을 갖춰가고 있었음을 밝혀냈다. 그러나 그러한 선행 조건들이 조선 후기의 봉건적 틀을 깨고 스스로 근대화의 길로 나가는 데 상당한 제약들이 많았으며, 이러한 상황에서 서양의 근대 문물들이 소개돼 조선 사회 안에서 이러한 문물들을 수용해 한국을 개화시키려는 세력들이 형성됐다는 것이다.

이 교수는 “지금까지 한국 사회는 다양한 사회의 질적 전환을 가져올 때 종교가 중요한 원동력을 제공했다”며 그 예로 삼국·고려시대의 불교, 조선시대의 유교, 조선 후기 서학·동학 등을 들었다. 그는 “이같은 원리로 개항 이후에는 근대 사회가 필요로 하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토대를 기독교가 제공한 것”이라며 “그러므로 개항 이후 근대 사회로의 발전에 공헌한 기독교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는 “이러한 기독교와 조선 개화세력과의 만남에서 기독교가 근대화에 기여한 일들 중 가장 주목할 부분은 네 가지 정도”라며 첫째 서양의 의료와 교육 같은 근대 문물과 문화의 전파, 둘째 일부 양반들을 중심으로 개화 주도층들이 기독교 수용 계기를 제공, 셋째 기독교 전파를 통해 남여평등·노동 가치관 확립·근대 민주정치 제도 도입 등 근대적 가치관 및 제도 확산, 넷째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저항하는 국내 지식인들을 통한 교육과, 자립경제 수립을 통한 애국 계몽운동 전개 등이라고 풀이했다.

“조선 정부와 개신교, 마찰 없었다… 호의적 한미관계 덕분”

▲박명수 교수. ⓒ이대웅 기자
박명수 교수는 기존 시각과 달리 “기독교(개신교)는 한국에 들어온 외래 종교들 중 유일하게 갈등이 없었다”고 주장했다. 신라는 불교를 들여오면서 이차돈이라는 순교자를 만들었고, 천주교도 오랫동안 조선 정부와 갈등 관계에 있었지만, 개신교는 조선 정부와의 마찰로 인한 순교자는 없었고 일본과 공산주의에 의한 순교자만 있었다는 것이다. 박 교수는 “이는 조선 정부가 미국을 긍정적으로 이해했고, 그 종교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해석했다. 실제로 당시 고종은 개신교 선교사들을 신뢰했다.

박 교수는 이를 토대로 한국 기독교의 시작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초기 한미관계를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사실 한국 기독교의 시작은 조선이 한미관계를 시작하면서 이뤄졌고, 조선 정부는 미국을 통해 서구 문명을 받아들이려던 과정에서 기독교 선교가 함께 이뤄졌다”며 “미국은 그들의 아시아 진출 과정에서 조선과 무역을 하려고 했고, 이 과정에서 선교사가 들어왔다”고 지적했다.

조선인들은 당시 미국에 호의적이었다. 천주교 전래와 함께 침략야욕을 드러낸 다른 서양 국가들과 달리 침략 의사가 없고 정교분리를 내세웠으며, 특히 영국과 싸워 독립한 국가였기 때문이다. 미국 상선이었던 제너럴 셔먼호를 격침시킨 장본인인 당시 평양감사 박규수가 미국을 “지구상 여러 나라 중에서 가장 공평하여 분쟁을 잘 조정하고, 부가 6대주 중 으뜸이어서 영토확장의 야심이 없는 나라”라며 “조선은 미국과 조약을 맺어 고립을 면해야 한다”고 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독교 도입에서는 ‘유림’이라는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이 존재하고 있었다. 당시 고종도 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종교는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입장이 분명했다. 그러나 미국의 문물을 전해줄 사람들이 기독교인 외에는 별로 없다는 점이 문제였다. 여기서 미국과 조선 사이에는 일종의 정략적인 묵인이 나왔고, 조선은 선교사들을 문명 전파자로서 받아들였다. 선교사들도 직접적인 복음 전파가 가능하지 않은 상황에서 이것이 최선임을 알았다.

박 교수는 “조선이 이런 계산된 묵인 정책을 사용한 것은 이익을 앞세우지 않고 순수하게 서구 문명을 전하려는 사람들이 선교사 외에 없었기 때문”이라며 “정책상으로는 서구 문명과 종교를 나눌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바로 그 서구 종교인이 문명의 전달자였다”고 분석했다. 오히려 기독교 선교의 가장 큰 장애는 무력으로 선교를 시도해 조선인들에게 반감을 갖게 했던 천주교였다. 그는 “황석영은 기독교가 이 땅에 침입한 원치 않은 손님이었다고 말하지만, 기독교는 한국에 들어온 어떤 외래 종교보다 조선 사람들의 호감 가운데 출발했고, 기독교는 이 땅에 근대화를 가져다 준 친구였다”고 결론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