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이 12월 20일 주일 성남 샬롬교회에서 전한 “성탄의 정신”(사 9:6, 고후 8:9, 사 53:4)이란 제목의 설교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성탄절은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신 중대하고 뜻깊은 날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셨을 때 어떤 모습으로 오셨는지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사 9:6). 그 전까지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오실 때에 주로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곤 했습니다. 그런데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마 2:11).

‘아기’는 모든 사람에게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약한 존재입니다.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도 ‘아기’를 싫어하고 무서워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어른이나 천사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고 한 ‘아기’로 오신 이유는 범죄한 우리 인간들에게 무서운 존재가 아닌 친근한 존재와 사랑스런 존재로 오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천사장의 모습으로 오셨다면 우리는 모두 무서워서 도망을 쳤을 것입니다. 사실 천사가 나타났을 때 요셉도 마리아도 양치던 목자들도 다 무서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오실 때 무서운 존재로 오시지 않았고 가장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그리고 약한 존재인 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얼마나 고맙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지금 우리 사람들의 모습이 너무 두렵고 무서워졌습니다. 정치가들은 물론 우리 종교인들의 모습마저 얼마나 두렵고 무서운 존재가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죄인들을 심판하는 판사나 검사의 모습을 지녔는지도 모릅니다. 교회가 너무 힘이 세어졌고 너무 강해졌다고 생각합니다. 섬기는 자의 모습보다는 정복자의 모습을 띠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아기’의 모습이 되어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그리고 따뜻하게 찾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아기’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신 또 하나의 이유는 우리 인간의 운명에 처음부터 ‘아기’ 때부터 마지막까지 참여하시고 짊어지시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마운 일이고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부자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탄생하신 곳은 마굿간의 여물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부요하신 자로서 우리들을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지적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8:9).

예수님은 가난해졌을 뿐 아니라 종의 모습까지 지녔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빌 2:6-7). 그가 자란 곳은 ‘가난한’ 천민들이 모여 사는 갈릴리 나사렛 마을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생을 ‘가난하게’ ‘약하게’ 사시다가 ‘가난한’ 모습으로 ‘약한’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눅 9:58).

예수님의 삶에는 부요함이나 풍요로움이나 과소비나 사치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약한’ 자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습니까? ‘가난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래 전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가 이 세상에 와서 하실 일 세 가지를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슬픈 자에게 위로와 화관을”(사 61:1-3). 예수님은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고, “슬픈 자에게 위로와 기쁨을” 주시기 위해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이요 메시야의 정신입니다.

누가복음도 그 사실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드리거늘 책을 펴서 이렇게 기록한 데를 찾으시니 곧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6-19).

성탄의 정신은 ‘가난한’ 자들에게 은혜의 복음을 전하며 사랑의 손길을 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난한’ 어부들에게 찾아가서 은혜의 복음을 전하셨고 자기를 따르는 ‘가난한’ 자들에게 8복을 전하시면서 첫째 복이 ‘가난한’ 자가 되는 것이라고 선포하셨습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눅 6:20). 예수님은 거지 나사로에게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는 축복을 부여하셨습니다.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서 그 헌데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눅 16:20-22).

예수님은 어느 날 ‘가난한’ 과부 한 사람이 두 렙돈의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크게 칭찬하시기도 했습니다.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눅 21:3). 어떻게 보면 예수님의 한 평생의 삶은 ‘가난한’ 사람들의 편에 서서 그들과 함께 사신 삶이었습니다. 지금 한국교회가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너무 부해지고 너무 강해지지 않았나 모르겠습니다. 가난한 자들보다는 힘있는 사람들에게 너무 많은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은 부자로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가난한’ 자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자들의 친구가 되어주셨습니다. 이것이 성탄의 정신이고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 인류의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을 때 평안의 모습으로 오시지 않았고 ‘고난’의 모습으로 오셨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시자마자 헤롯 왕에 의해서 죽임을 당할 ‘고난’의 형편에 처했고 애굽으로 도망을 가야 하는 ‘고난’의 형편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소년 시절에는 노동의 수고와 가난의 ‘고난’도 경험했습니다. 그래서 오래 전에 선지자 이사야는 메시야의 모습을 ‘고난’의 종이라고 묘사했습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싫어 버린 바 되었으며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사 53:3,4).

예수님께서는 자기가 많은 ‘고난’을 받고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미리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도 했습니다.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 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마 16:21).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 못 박혀 죽으시는 저주의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인간의 ‘고난’의 운명을 짊어지시기 위해서 ‘고난’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고난’과 ‘고통’의 모습으로 죽으셨습니다. 얼마나 황송하고 얼마나 고마운 일인지 모릅니다.

성탄의 정신과 예수님의 정신은 그리스도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그리고 불우한 사람들을 위해서, ‘고난’을 짊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핍박과 곤란을 기뻐하노니”(고후 12:10).

하나님께서 우리 신자들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사도 바울이 지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빌 1:29). 사도 베드로도 고난의 유익과 축복을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벧전 4:16). 그래서 손양원 목사님은 ‘가난’을 애처로 ‘고난’을 스승으로 삼으면서 가난하게 사셨고 고난을 당하면서 살았습니다.

현대인들은 성탄의 고난과 십자가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게 되었고 평안과 부요함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의 비극적인 고난의 운명에는 아랑곳하지 않는 극히 이기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성탄의 정신은 주님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고 불우한 동포와 지구촌 형제들의 고난의 운명을 함께 짊어지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무리합니다. 성탄의 달을 맞아 우리도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처럼 약하고 친근하고 사랑스러운 ‘아기’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성탄의 달을 맞아 우리도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가난한’ 자의 모습을 지녀야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성탄의 달을 맞아 우리도 ‘고난’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처럼 ‘고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지녀야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그리고 우리의 관심을 ‘약한’ 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고난’을 당하는 자들에게로 돌려야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는 약하고 가난하고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할 것은 주님처럼 약하고 가난하고 검소하고 불편하게 살면서 가난한 자들과 고난 당하는 자들을 찾아가서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과 북한에서 살면서 우리보다 더 고통 당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사랑과 도움의 손길을 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고등학생일 때 교회의 친구들과 함께 ‘거지 잔치’를 마련한 일이 있었습니다. 남대문 지하에서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을 초청해서 떡국을 대접하는 ‘거지 잔치’를 마련한 일이 있었습니다. 성탄의 달을 맞아 성탄의 정신을 되새기십시다. 가난한 자들과 고난 당하는 자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며 사랑과 위로와 도움의 손길을 펴는 일을 조금씩이라도 실천하십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