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이 11월 15일 강변교회에서 전한 추수감사주일 설교의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제가 작년 추수감사주일날 강변교회에서 “다윗의 감사와 나의 감사”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했습니다. 제가 작년에 한 설교의 일부를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습니다. “감사를 가슴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아름다운 사람이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감사와 함께 기쁨과 기도와 사랑과 보고 싶음을 가슴에 지니고 사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최고로 아름답고 최고로 행복한 사람일 것입니다.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고 자연만물을 바라보면서 그리고 자기 자신을 바라보면서 감사와 감격에 넘치는 행복한 삶을 살았습니다. 다윗은 자기의 모습을 이리로 보나 저리로 보나 두려울 정도로 놀라울 정도로 멋지고 대단하게 지어졌음을 바라보면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돌렸습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I will give thanks to you and I will praise you for I am fearfully and wonderfully made). 첫째로, 다윗은 자기를 하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는 믿음의 존재로 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둘째로, 다윗은 자기를 울면서 회개할 수 있는 눈물의 존재로 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셋째로, 다윗은 자기를 용서하며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의 존재로 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넷째로, 다윗은 자기를 보고 느끼면서 시와 노래로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찬양의 존재로 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다섯째로, 다윗은 자기를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하는 천국 소망의 존재로 지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부족한 저에게도 다윗이 가슴에 지니고 살았던 다섯 가지 감사의 조목들을 지니고 살게 하신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립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로 여러분들과 제가 남은 여생을 원망과 불평대신, 근심 걱정대신, 미움과 분노대신, 무정함과 냉정함 대신, 감사와 함께 기쁨과 기도와 사랑과 보고 싶음을 가슴에 지니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제가 작년에 한 설교의 요점입니다. 오늘은 “바울의 감사와 나의 감사”를 세 가지로 요약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첫째로,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기를 불쌍히 여기셔서 직분을 맡기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딤전1:12-16).

여기 ‘긍휼’이라는 말과 ‘풍성한’ ‘은혜’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과 ‘풍성하신’ ‘은혜’로 죄인 중의 괴수가 예수님의 일꾼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은 한평생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살았을 것입니다. “나는 죄인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부르셨을까? 나는 죄인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일꾼으로 그리고 사도로 삼으셨을까? 나는 깨어진 질그릇 같은 자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왜 예수님께서 나를 버리시지 않고 지금도 증인으로 사용하실까?”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울고 또 울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와 같은 중얼거림과 울음을 막달라 마리아가 했고 한국교회의 아버지이신 길선주 목사님과 이기풍 목사님께서 평생토록 하셨습니다. 이기풍 목사님은 제주도 선교를 시작할 때부터 전라도에서 순교하실 때까지 평생 새벽마다 강대상을 붙잡고 울면서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 나는 죄인 중의 괴수외다”라고 부르짖곤 했다고 합니다.

저는 이런 분들과는 도저히 비교도 할 수도 없는 위선자이고 망할 자이지만 저도 거의 한평생 특히 지난 2년 동안 이와 같은 중얼거림과 울음을 지니고 살아왔습니다. 이곳 저곳으로 설교를 하러 다니면서 하루에도 백여번씩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 주님, 나를 불쌍히 여기시옵소서!”라고 중얼거리면서 눈물을 흘리곤 했습니다. 부족한 저의 설교를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은혜를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바라볼 때 저의 고백은 더욱 더 처절해지곤 했습니다. “나는 죄인인데, 나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나는 위선자인데, 나는 망할 자인데, 어째서 오늘도 하나님께서 나를 내어 버리시지 안으시고 사용하십니까?” 저의 감사의 첫째 조목은 나 같은 죄인 중의 죄인을 불쌍히 여기셔서 주님의 종으로 삼으시고 아직까지 버리지 않으시고 주님의 종으로 사용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찬송을 부릅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사용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데 없는 자 왜 사랑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둘째로, 사도 바울은 자기는 죄인 중의 괴수인데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귀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을 만들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빌 1:3-5).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살전 1:2,3). 사도 바울은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고 자기에게 허락하신 믿음과 사랑과 소망과 헌신의 아름다운 성도들을 생각하면서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이제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노니”(빌 3:18).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과 데살로니가 교회 성도들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들에 대한 감사와 사랑을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 1:8).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빌 4:1).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살전 2:17-20).

사도 바울은 자기를 위해서 목이라도 내어 놓으려고 했던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감사를 드렸고, 감옥에까지 찾아와서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고 사도 바울을 섬긴 에바브로디도를 생각하면서 뜨거운 감사를 드렸습니다.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롬 16:3,4). “에바브로디도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 2:25,30).

사도 바울은 또한 자기를 위해서 마음을 열고 손을 열고 집을 연 루디아를 생각할 때 마다 뜨거운 감사를 드렸을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도 이 땅 위에 살고 있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바라보시면서 기뻐하시고 사랑하시고 즐거워하신다고 말씀했습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시라 그가 너로 인하여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인하여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습 3:17). 어떤 때는 땅 위에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시면서 ‘헵시바’ 라고 부르시기도 했습니다(사62:4). “나의 기쁨’과 ‘나의 사랑’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다윗도 땅에 있는 성도들을 바라보면서 즐거워했습니다. “땅에 있는 성도는 존귀한 자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저희에게 있도다”(시 16:3).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저를 통해서 주님을 믿게 되고 주님을 사랑하게 되고 주님께 헌신하게 된 수많은 성도들이 저에게 베푼 사랑과 기도와 격려와 도움의 손길을 생각할 때마다 저들에게 진심으로 뜨거운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셋째로, 사도 바울은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던 자기를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하고 고난을 당하는 수고와 고난의 종으로 만들어주신 것을 생각하면서 감사를 드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서 수고와 고난을 넘치도록 당했는데 그것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우리 신앙의 선배들도 수고와 고난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가면서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드렸습니다. 이기풍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주기철 목사님, 손양원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이 모두 그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평생 예수에 미쳐서 ‘예수 천당’을 외치면서 살았던 최권능 목사님(최봉석 목사님)의 수고와 고난에 대한 이야기를 한 마디 하려고 합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기도와 전도에 미친 사람이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수고와 고난을 당했습니다. 최권능 목사님은 1914년부터 노회의 파송을 받아 만주 전도에 전념했습니다. 넓은 만주 벌판을 10리 20리씩 걸어 다니며 조선 동족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수많은 고난을 무릅쓰고 12년 동안 복음을 전한 결과 28개의 교회를 세웠습니다. 때로는 굶기도 하고 때로는 몽둥이와 돌멩이로 맞아서 쓰러지기도 했습니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가 주님의 음성을 듣고 다시 일어나서 “예수님은 누구신가” 찬송을 부르면서 걸어가곤 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서 때로는 올챙이를 잡아 먹기도 했고, 어떤 때는 소 똥에 들어 있는 콩알을 꺼내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소 똥에서 익은 콩이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제는 힘이 났으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곳에 데려다 주시옵소서.” 그리고 다시 걸어갔습니다. 우리들의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과 사도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십자가의 길, 즉 수고와 고난의 길 그리고 순교의 길을 기쁨으로 걸어갔습니다. 지금 우리들은 세상의 안일과 평안과 돈과 명예를 너무 좋아하는데 우리들의 선배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수고와 고난의 기쁨을 지니고 십자가의 길로 걸어갔습니다. 부끄럽고 고마울 뿐입니다.

저는 부족하고 부족하지만 우리 신앙의 선배들을 좇아서 수고와 고난의 길을 조금이라도 걸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저도 수고와 고난의 기쁨을 몸에 지니고 감사하면서 살아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는 지금 너무 편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걸어가신 수고와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는 없지만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그 길을 걸어가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영혼을 위해서라면 재물도 허비하고 자기 자신도 허비하기를 기뻐한다고 고백했는데 저도 그 흉내를 조금이라도 내기를 소원하고 있습니다.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너희가 나를 덜 사랑하겠느냐?”(고후 12:15). 저는 작년 1월 13일 강변교회에서 은퇴한 후 주일마다 또는 주중에 전국에 흩어져 있는 작은 교회들을 방문하고 설교를 하면서 은혜와 사랑을 전하고 있는데, 약간은 수고로운 면도 있지만, 자전거를 타고 또는 리어카를 타고 이곳 저곳으로 다니시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던 이성봉 목사님을 생각하면 너무 편하고 너무 편해서 죄송한 마음을 품을 뿐입니다. 저는 자동차를 타고 운전하면서 편하게 이곳 저곳을 다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지난 10월 저의 집 사람과 그리고 이현정 목사님 부부와 함께 중국 연변 지역에 있는 여덟 도시들을 방문하며 200여명의 불쌍한 조선족 어린이들을 만나서 조그만 사랑과 위로와 격려의 손길을 폈는데, 조금은 수고로운 점도 있었지만, 말을 타고 인디언들을 찾아 다니던 데이빗 브레이너드에 비하면 너무 편하고 너무 편해서 죄송한 마음을 품을 뿐입니다. 우리는 소형 버스를 타고 편하게 이곳 저곳을 다녔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고 그리고 허락하신다면 그리고 그것이 불쌍한 사람들의 영혼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저는 조금 더 수고로운 길 조금 더 고난이 되는 길로 걸어가기를 소원합니다. 그리고 재물과 자신을 조금이라도 허비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그것이 저의 세번째 감사의 조목이 될 것입니다. “주님, 부족한 저에게도 평양에서 순교의 길을 걸어가신 주기철 목사님, 최봉석 목사님 그리고 저의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이 걸어가신 수고와 고난의 길을 조금이라고 흉내를 내면서 걸어가게 하실 수는 없으십니까! 그러면 부족한 저는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와 무한한 영광을 돌리겠습니다!”

좀 심각한 내용의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솔직한 심정으로 저의 간절한 고백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저와 여러분들에게 사도 바울이 가슴에 지녔던 순수한 감사를 지니고 기쁘게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들인 저와 여러분들을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셔서 피로 사신 교회의 귀한 직분들을 맡기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면서 기쁘게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들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서 귀하고 아름다운 성도들을 만들어주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돌리면서 기쁘게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죄인 중의 괴수들인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과 이웃들을 위해서 조그만 수고와 조그만 고난을 감수하며 수고와 고난의 길로 걸어가게 하신 것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무한한 감사를 돌리면서 기쁘게 살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의 은혜 기쁨의 은혜를 저와 여러분들에게 충만하게 부어주시기를 소원합니다. 감사와 함께 기쁨과 기도와 사랑과 보고 싶음을 가슴에 지니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감사와 함께 기쁨과 기도와 사랑과 보고 싶음을 가슴에 지니고 행복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게 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한경직 목사님께서 좋아하시던 말씀을 읽어드림으로 말씀을 맺습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살전 5:1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