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동근 목사(온누리선교교회).
15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무엇이 작은 여우인가? 죄가 아니더라도 옛 생명의 작은 표현이나 습관 혹은 취향 등일 것이다. 주관적으로 주님을 따르는 첫 발걸음을 방해하고 포도나무로 열매맺을 수 없게 하는 것이 바로 작은 여우다. 이 작은 여우를 처리하는 것은 여인 혼자 할 수 없고 왕과 협력해야만 한다. 믿는 이들에게는 대개 자신의 영적 생명을 자라지 못하게 하는 한두 가지 나쁜 습성들이 있다. 그들은 그것을 알면서도 버리지 못한다.

영적 성장의 과정에 있는 성도에게는 반드시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 한두 가지 있다. 어떤 사람은 쉽게 화를 내는 것이고, 어떤 사람은 남들과 비교하고 시기하는 것이며, 어떤 성도는 쉽게 마음이 상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은 거의 모든 삶이 감정의 지배를 받는다. 감정이 상하면 어떤 것도 하려 하지 않는다. 심지어 주님이 원하시는 것도 싫게 느껴진다. 감정 때문이다. 감정이 상할 경우 성도들과의 관계나 섬김도 쉽게 포기한다.

그러한 성도에게 쉽게 만져지는 감정이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다. 막 생명이 자라려 할 때 헐어버리는 것이다. 어떤 성도에게 여우는 좋지 않은 습관이다. 더러운 것을 보고 즐기는 것, 악한 정욕, 무절제 등이 작은 여우가 된다. 게으름조차 작은 여우가 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생활을 크게 지배하는 요소는 아니지만 작은 습관으로서 일단 거기에 걸리면 넘어지고 영적 하늘에 즉시 어둠이 깔리게 된다. 지속적으로 생명이 성장하려면 이런 작은 여우를 잡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은 능력의 생명이며 원하는 자에게 역사하여 작은 여우를 처리하도록 도와주신다.

여인의 상태―자아 중심적임

16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여기서 여인은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라 말한다. 아직 이 여인은 자신을 위한, 자신의 느낌에 따라 주님 안에 머물고 있다. 주님을 위한 내가 아니라 나를 위한 주님이다. 또한 자기 자신을 백합화로 여긴다. 이것 또한 자신을 중심삼는 것이며 주님이 중심이심을 모르는 것이다. 나를 먹이시는 주님, 나를 양육하시는 주님이라 한다. 백합화 가운데 양떼를 먹이시는 주님, 공급하시는 주님이 나에게 속했다고 말한다.

어떤 성도는 자신이 진리에서 조금도 어긋남 없이 길을 걷는다고 자랑한다. 그러한 사람 속에는 다른 사람들보다 참된 길을 간다는 것에 대한 자만이 감취어 있다. 자신만이 말씀대로 살고 조금의 오차 없이 말씀을 지키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사람들의 신앙은 본질상 바리새인들과 맥락을 같이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말씀을 지키며 말씀대로 사는가를 매우 주의한다.

물론 성경에는 주님을 사랑하는 자들이 주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의 중요성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결국 주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임을 말씀하셨다. 이는 말씀을 지키려다 자아에 빠질 수 있음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주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그분이 말씀을 지키고 거룩하게 사시는 것조차 우리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셨다.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케 하오니(요 17:19)”. 주님의 모든 삶은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라는 자기 중심적 신앙은 아직 영적으로 어린 것임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17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아직 자신에게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여인이 자신의 상태를 시인한 것이다. 주님과의 연합이 충분히 깊지 않음을 알고 있다. 여기 베데르 산은 ‘분리’를 뜻한다. 분리란 우리 주님과 믿는 이들 사이에 간격이 있다는 뜻이다. 아직 그림자가 있다. 그런데 그림자가 갈 때 돌아와 달라는 것은 주님과의 사이에 약간 간격이 있어도 별 느낌이 없는 상태다. ‘언젠가 나의 이 그림자가 다 지나갈 것이 아닌가? 그때 돌아오시면 노루와 사슴같이 주님과 함께 뛰고 움직일 수 있지 않겠는가?’는 뜻이다. 이것은 아직 자아 중심적인 그리스도인의 상태다.

성장한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신다. 그러나 자아 중심적인 그리스도인은 ‘내가 만족한가, 내가 주님을 잘 누리고 있는가, 내게 기쁨이 있는가, 내가 양육을 잘 받고 있는가, 내가 잘 자라고 있는가’를 관심한다. 심지어 ‘내가 말씀을 잘 지키고 있는가, 내가 승리하는 그리스도인인가, 이기는 자가 될 것인가’ 하는 것조차 모두 자기 중심적 신앙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성장할 때 자신을 중심삼지 않고 우리 주님을 중심삼는다. 또 다른 사람의 유익을 중심 삼는다. 주님이 기뻐하시는지, 주님이 만족하시는지를 관심한다. 모든 것의 중심이 그리스도이시다. 나의 득실(得失)이 어떠하더라도 주님이 하시는 일에만 마음을 쏟는다. 이러한 그리스도인이 성장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이 단계는 자신을 중심삼는 것이다. 이러한 여인은 주님과 간격이 있다. 이러한 여인에게 주님은 십자가로 오라고 권하시며 자아에서 나오라고 부르신다.

자아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십자가다. 자아를 중심삼는 성도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안에 사시도록 할 수 없다. 자아를 벗어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실 수 있도록 우리는 전진해야 한다.

2장의 영적 체험 중심

2장의 상태에 이끌린 성도는 주님을 체험해 가면서 매우 기뻐한다. 그는 주님의 양 무리 가운데로 이끌려 잔칫집의 누림을 갖는다. 여기서 추구하는 자는 주님으로 인해 사랑의 병이 날 정도로 관계가 좋다. 주님으로 인해 큰 누림과 기쁨을 갖는다. 다만 주님과의 달콤한 교제로 인해 다른 아무것도 원치 않는 상태에 이른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성도에게 부활의 풍성과 능력을 알려주시면서 십자가를 체험하도록 부르신다. 이것이 바위 틈 은밀한 곳이 의미하는 바이다.

주님은 그곳에서 성도의 얼굴을 보고싶어 하신다. 이는 대체적으로 주님이 안배하시는 환경의 십자가를 의미한다. 주님만을 사랑하고 따르다 보니 외로운 비둘기가 되어 바위 틈에 있게 되는데, 주님은 그러한 곳에서 외롭게 주님을 따르는 믿는 이의 얼굴을 보고파 하시는 듯하다.

그렇지만 그때 이 성도는 아직 많은 면에서 자아중심적이다. 자신을 온전히 버리지 못했다. 성숙한 상태에 이르기까지 먼 길이 남아있다. 주님은 이러한 성도를 창살 틈으로 엿보고 계신다. 주님과 성도 사이에는 자아의 벽, 분리의 벽이 아직 존재한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러한 성도를 매우 사랑하시고 아름답다고 하신다. 그러한 성도가 이 단계에서 주의할 것은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다. 생명의 성장을 가로막고 얻은 생명을 소실되게 하는 좋지 않은 옛 사람의 습관이나 기질을 처리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생명의 성장에 있어서 매우 긴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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