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이 글은 김명혁 목사님이 10월 18일 일본 가키오 그리스도교회에서 전한 “인생 칠도와 복음삼도”(히 11:13-16, 고전 1 :22-31) 설교문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제가 나이가 들면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깨닫고 배우는 일들이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일례를 들면 “설교는 은이다, 신학은 동이다, 이적은 철이다, 주님을 닮으려고 하는 삶이 금이다”. 설교는 은이고 신학은 동이고 이적은 철이고 삶이 금이다. 주님 닮은 온유와 겸손과 불쌍히 여기는 긍휼과 사랑의 삶, 그것만이 금이다. 온유와 겸손과 긍휼과 사랑의 삶, 그것만이 금이다. 그런 여러 가지 깨달음 중의 하나가 인생 칠도입니다.

처음에는 인생오도 그러다가 인생칠도로 늘어났습니다. 첫째, 인생은 나그네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생활을 했지요. 모세도 나그네 생활을 했지요 예수님도 하늘 고향을 떠나 땅에서 나그네 생활을 했지요. 사도들도 사도바울도 전부 나그네 생활을 했지요. 나그네 생활은 불편하고 힘들고 외롭죠. 그런데 믿음으로 사는 삶은 나그네 생활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이 사람들은 다 나그네요 행인이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대한민국 안에서만 사는 것도 문제고 일본 안에서만 사는 것도 문제죠. 청교도들은 유럽을 떠나서 신대륙에 와서 새로운 삶을 살았죠. 나그네 생활을 하면 내 집착 내 지역에 대한 애착 내 민족에 대한 애착에서 좀 벗어나죠. 마음이 넓어지죠.

둘째, 인생은 만남입니다. 나그네들에게 필요한 것은 만남입니다. 아브라함이 나그네 생활하면서 하나님 만났고 모세가 나그네 생활하면서 하나님 만났습니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가서 애굽사람을 만났죠. 모세가 애굽에 가서 애굽 사람을 만났죠. 베드로가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를 만났죠. 사도 바울이 소아시아 마게도냐 로마에 가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죠. 모든 일은 만남에서 시작이 되죠. 만남에서 모든 것이 시작이 됩니다. 만남이 귀찮아지고 힘들 수도 있지만 누구나 만나려고 해야 되죠. 예수님은 수가성에 사는 여자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일부러 그리로 찾아갔죠. 만남을 확장하는 것이 인생이다. 그것이 목회요, 그것이 선교이다.

세번째, 인생은 나눔입니다. 쉐어링 파트너시핑(Sharing partnershiping), 만나서 함께 하는 거예요. 그냥 ‘헬로우’ ‘안녕하세요’ 하고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음식도 같이 먹고 놀러도 같이 가고 구제하는 것도 함께하고 나누는 것이 중요해요. 사랑도 나누고 슬픔도 나누고 먹는 것도 나누고 모든 것을 나누는 거에요.

네번째, 인생은 버림입니다. 정말 나누기 위해서는 자기의 시간, 돈 그리고 자기 자신을 버려야 합니다. 내 시간도 버리고 내 물질도 버리고 내 생명도 버려야 진짜 나눌 수가 있지요. 예수님은 나는 양들을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린다 그랬습니다. 내 피를 마셔라 내 살을 먹으라 그랬습니다. 사도 바울은 내 물질도 버리고 내 생명도 버린다고 그랬습니다.

다섯번째, 이런 만남과 나눔과 버림의 삶을 살 때 기쁨이 주어집니다. 세상이 알지 못하는 특별한 기쁨, 하나님이 주시는 순수한 기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모세, 솔로몬, 다윗, 사도 바울 등, 전부를 보면 저들이 마지막에 가장 귀하게 여긴 것이이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인생 오도라고 그랬어요.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세상은 아직 천국에 비하면 그렇게 충만한 기쁨은 없어요. 어거스틴도 천국에 비하면 이 세상에 것은 다 헛되고 슬픈 것뿐이라고 했어요. 모세도 시편 90편에 이 세상의 삶은 슬픔과 고난뿐이라고 했어요.

그래서 여섯번째, 인생은 헛됨(vanity)이다 그랬어요. 다윗은 이 세상의 삶은 그림자와 같다, 없는 것과 같다 그랬어요. 모세는 아침에 돋아났다 없어지는 풀과 같다고 그랬어요. 솔로몬은 헛되고 헛되고 모든 것이 헛되다고 했어요. 그래서 여섯번째는 인생은 헛됨입니다.

그것으로 그치면 불교와 비슷하게 될 것 같아요. 그래서 일곱번째, 하나 더 했어요. 인생은 떠남이다. 떠남에는 부정적인 의미와 긍정적인 의미가 있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고 가족을 떠날 때 슬픈 것도 있어요. 그러나 사실은 하늘 아버지 집으로 떠나기 때문에 더 큰 기쁨이 있어요. 사도 바울은 내가 떠날 때가 되었다. 나는 빨리 떠나기를 원한다고 했어요. 예수님도 내가 떠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거다라고 했어요. 그래서 떠남을 준비하는 게 인생입니다. 빈손으로 왔으니까 빈손으로 떠나도록 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축복을 다 나누어주고 떠나야 됩니다. 그것이 인생 칠도입니다.

복음 삼도에 대해서는 짧게 하겠어요. 복음이 뭐냐, 십자가의 복음의 깊이는 뭐냐. 고전 1장과 고후 12장에 보면 사도 바울이 강조한 게 하나 있어요. 약함이었어요. 십자가는 약한 거다. 나는 약하다. 나는 모든 약한 것을 기뻐한다. 예수님은 약해지셨어요. 맞아도 데모하지 않았어요. 인권이 유린되었다고 데모하지 않았어요. 초대교회 300년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박해를 받았지만 데모한 일이 없었어요. 교회가 힘이 세어지면 데모를 많이 해요. 강해지는 것은 기독교가 아니에요. 십자가가 아니에요. 지금 한국교회는 그동안 데모를 너무 많이 했어요. 성 프랜시스는 약했어요. 한경직 목사님도 약했어요. 사도 바울은 나는 약하고 두렵고 떨린다고 했어요. 십자가는 약한 거다. 난 약해지기를 바란다. 1991년 6월 시오바랴에서 신 후나키 선생님이 약함에 대해 설교를 했어요. 하나님께서 약한 것들을 택하여 쓰시는 분이라고 그랬어요. 한국교회는 너무 부해지고 강해졌어요. 이게 문제입니다. 약해지면 아무도 두려워도 안하고 무시도 못해요. 너무 강해지면 두려워하고 반대해요.

복음 삼도의 둘째는 착해지는 겁니다. 능력을 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소금이다 빛이다 그러고는 그게 뭔가 하면 착해지는 거다 그랬어요. 사도행전에 보면 사도 바울보다 더 중요하게 활동한 인물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능력의 사람이라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성 프랜시는 착함의 사람이었습니다. 모두를 사랑했습니다.

셋째 조금 어려운 말인데 주변성. 주변으로 가는 겁니다. 대한민국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땅끝 니느웨로 가는 겁니다. 십자가는 땅끝으로 주변으로 가는 겁니다. 이스라엘 사람만 위한 게 아닙니다. 미국 사람만 위한 게 아닙니다. 십자가는 동과 서가 만나는 곳입니다.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입니다. 에베소서 2장에서 사도 바울이 이야기 했습니다. 십자가로 멀리 있던 너희가 가까워졌다. 기독교는 멀리 멀리 가는 겁니다. 무슬림이 사는 아프간으로 가는 겁니다. 가장 강한 공산주의자들이 사는 북한으로 가는 겁니다. 때려부수러 가는 게 아닙니다. 착한 일을 하기 위해 가는 겁니다. 때론 죽기 위해서 갑니다. 이것이 복음 삼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