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복지원 입구에 자리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에서 장애 아이들이 생활한다. ⓒ 김진영 기자
서울 강남에서 차를 타고 양재를 지나 성남 방향으로 향하다 보면 헌인가구공단이 눈에 띈다. 도심의 빌딩과 주택을 저만치 뒤로 밀어내고 몇 개의 가구 공장이 자연의 품에 안긴 곳. 수많은 차들로 좁디 좁은 강남의 도로를 벗어난 버스는, 제대로 한번 달려보자는 듯 힘을 내고 있었기에 인적이 드문 이곳에 발을 내려놓기까지 바짝 긴장해야 했다. 약도를 손에 들고 대로변에 몸을 내리자 나를 튕겨낸 버스는 다시 스피드를 올리고 금세 눈에서 사라져 갔다.

아무리 둘러봐도 복지원 같은 곳은 보이질 않는데. 길을 물으려 해도 사람들이 있어야지. 뜨거운 햇살은 가구공장 사이 사이로 나를 인도했지만 끝내 복지원은 보여주질 않았고, 결국 길에서 만난 사람에게서 내가 반대로 걸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여기 복지원이 있기나 한 걸까. 왜 이런 복지원들은 항상 멀리 떨어져 외딴 곳에 있는지를 불평하며 다시 걸음을 재촉했고, 겨우 약속 시간에 맞춰 다니엘 복지원에 도착했다.

하나님은 무슨 이유에서 장애인을 태어나게 하시는지. 젊은 혈기의 경거망동이나 바쁜 일상 속에서의 실수, 그리고 예기치 못한 사고로 몸의 어느 한 부분이 망가졌다면 그나마 덜할텐데, 이건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부모의 실수도 아닌데 남보다 모자란 무언가를 갖고 태어났으니 억울하기 그지 없다. 이 역사적 억울함은 예수님 때부터 제자들을 괴롭혔던 것이라 성경에까지 기록돼 있다. 대체 그 하시는 일이 무엇이기에 하나님은 장애를 가진 몸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셨을까(요한복음 9장).

다니엘 복지원은 지능지수 70이하의 지적장애 아동 1백 명이 생활하고 있는 곳이다. 지난 1955년 미국인 선교사 다니엘 여사가 한국전쟁 고아들을 위한 장소로 설립해 1972년 국내 최초로 지적장애 아동들의 보호, 의료, 교육 시설로 변경, 지금에 이르렀다. 이곳 아이들은 대개 부모가 없다.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는 것만큼이나 어렵게 찾은 이곳. 장애인들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을 알아보겠다고 찾아왔지만 막상 때가 되니 긴장하는 마음에 약간의 두려움까지 겹친다. 비장애인들의 사회에서 살아온 나 자신이 이곳에선 그야말로 ‘다른 모습’의 이방인으로 여겨질지 모른다는 생각에서다. 입구에 다다르자 마치 날 이상한 사람 보는 듯한(그러니까 순전히 내가 그렇다고 생각한 것이다) 눈의 아이들이 배시시 웃으며 뛰어다닌다.

이곳에서 생활하는 1백 명의 아이들은 모두 열 명씩 열 개의 반에 나눠져 각 반을 맡은 두 명의 재활교사들과 함께 지낸다. 교사들은 서로 번갈아 가며 하루씩 아이들을 돌보는데 한 명의 교사가 오전 10시부터 다음 날 오전 10시까지 아이들과 함께 있다 또 다른 교사와 교대하는 식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항상 일손이 모자란다. 혹 말도 못하고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아이라도 있으면 교사는 항상 그 아이를 붙들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힘은 배로 든다. 내가 함께 생활했던 요셉반의 진우(가명·남·10)도 말을 못하고 몸을 가누지 못하는 아이다.

복지원과 함께 있는 다니엘 학교가 파하는 시간인 오후 3시. 요셉반으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진우는 반가운지 한쪽에 가방을 벗어두며 “다녀왔습니다”하는 형들을 향해 두 팔을 벌린다. 웃는 모습이 천상 여자아이같은 진우가 두 팔을 벌리면서 웃으면 지금 자기 기분이 제일 좋다는 뜻이다. 그런 진우를 아이들은 본채 만채하고 저마다 뭐라고 중얼 중얼 하는데, 그 동안 조용했던 방이 왁자지껄 정신이 없다.

이날 아이들을 돌본 교사는 송정언(여) 씨. 한 손으로 진우의 작은 손을 잡은 그녀가 내게 화장실 청소를 부탁했다. 화장실은 두 반 아이들, 그러니까 20명이 함께 사용하는 곳이라 한번에 4~5명이 샤워를 해야 하는데, 그렇게 아이들이 한꺼번에 화장실을 쓰고나면 비누에 샴푸, 타월이 이리저리 어질러져 자주 청소를 해줘야 한다. 그래도 아이들에겐 원칙이 있다. 샤워가 끝나고 옷을 입지 않은 채 알몸으로 밖으로 나와선 절대 안 되고, 마지막으로 화장실을 쓴 사람이 꼭 정리를 하고 나와야 한다는 것. 물론 교사들이 뒤를 봐줘야 하지만 아이들은 그런 자신들을 스스로 자랑스러워 하는 듯했다.

▲ 자동차를 무척이나 좋아하는 진우는 비록 말은 못하지만 그 눈에서 행복을 읽을 수 있다.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진우의 손이 더 가냘파 보인다. ⓒ 김진영 기자
아이들과의 산책 시간. 진우의 손을 꼭 붙잡고 밖으로 나섰는데, 햇살을 맞은 진우의 입가엔 어느새 미소가 한 가득이다. 기분 좋은가 보구나. 밖으로 나오자 마자 수철(가명·남·14)이는 정신 없이 뛰기 시작한다. 수철이는 정말 귀찮을 정도로 내게 글을 읽혔는데, 눈에 글만 띄면 손가락으로 그 글자를 가리키며 내게 읽어보라고 한다. 가끔 나도 모르겠다며 수철이에게 읽어보라고 시키면 수철이는 자신 있게 “이보”라고 한다. 아무리 일본이라고 가르쳐줘도 받침을 잘 발음하지 못하는 수철이는 도대체 뭐가 틀렸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눈으로 연신 “이보 이보”했다. 그것도 얼굴에 함박 웃음을 머금은 채로, 글 잘 읽는 자신이 자랑스럽다는 듯이.

진우는 자동차에 유독 관심이 많다. 자동차 근처에만 가면 손으로 자동차를 쓰다듬고 유리창에 자신을 비춰보며 신기해한다. 옷에 검댕이 묻을까봐 손으로 잡아끌면 그 작은 몸은 자동차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어~!” 진우가 입으로 낼 수 있는 유일한 소리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낸다. 얼마나 답답할까. “나는 자동차가 좋단 말야. 이거 놔. 자동차 계속 만지고 싶어!” 이렇게 말하고 싶을텐데. 단지 “어~!”라는 감탄사와 한 없이 해맑기만한 눈만이 자신의 마음을 내비칠 수 있는 유일한 의사소통 수단일 수밖에 없으니. 결국 허락을 하면 진우는 다시 자동차를 부여잡고 뭐가 그리 좋은지 다시 얼굴 한 가득 미소를 머금는다.

열 네 살 현수(가명·남)는 비록 장애인이지만 말도 또박 또박 잘 하는 편이고 호기심도 많아, 이 아이가 정말 장애인일까를 생각하게 만드는 아이다. 그의 꿈은 군인이다. 멋진 군인이 되고 싶단다. 날 보면서 “군대 갔다 왔어요?” “군대 어디 있어요?” “군대 가려면 몇 번 버스 타야되요?” “총에 맞으면 피나죠?”라고 묻는 현수가 귀여워 나중에 멋진 군인이 될거라고 말해주면서, 이곳에 온 후 처음으로 마음 한 구석이 슬프다는 걸 느꼈다. 경찰이 되겠다는 아이, 좋은 선생님이 되겠다는 이 아이들이 꿈을 이룰 수 있으려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보다 더 좋아져야겠구나. 아니, 나부터 좋아져야겠구나 하는 거룩한 사명감을 현수는 내 마음에 불어넣었다.

간식시간.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다. 간식이라고 해봐야 과자 몇 봉지가 전부지만 아이들에겐 이만한 게 없다. 앉은 자리에서 부스러기까지 깨끗하게 먹어치운 아이들은 엄마(송정언 씨를 아이들은 엄마라고 부른다.)의 지시에 따라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었다.

“장애인이라고 해서 일상생활 전부를 다 도와주는 것은 아니에요. 그들 스스로 자립을 할 수 있도록 교육하고 천천히 발전할 수 있도록 돕는 게 복지이기때문에 저도 이곳에서 일하면서 이들을 더 특별하게 도와줘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도움을 줘야 한다는 생각보다 함께 배워 나가는 공동체라고 생각해요.”

아이들이 좋아 이 일을 한다는 송정언 씨는 진우를 하루종일 몸에 단 채 아이들과 씨름하면서도 “마음이 따뜻한 아이들 덕분에 마음을 다 잡을 수 있고 작은 것에서도 행복을 느끼는 그들의 순수함에 오히려 배우는 것이 더 많다”고 했다. 마냥 도움을 줘야만 할 것 같은 장애인들. 비장애인들이 자신이 가진 것을 희생하고 나눠줄 때에만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은 장애인들에게서 오히려 행복의 의미를 깨닫고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여유를 얻는다는 송정언 씨의 이 고백은, 하나님의 피조물인 한 영혼을 사랑하고 그것의 의미를 발견한 자만이 할 수 있는……, 바로 그것이다. 하루 이틀 길게는 일주일, 자원봉사라는 타이틀을 달고 짧은 사랑을 보여주고 떠나는, 나를 포함한 사람들은 결코 그같은 고백을 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아이들은 그 짧은 사랑에 목말라 “언제 또 와요”라는 말에 애절한 눈빛을 담는다.

소아마비 장애인이었던 고(故) 장영희 서강대학교 교수는 그의 책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남들이 ‘장애인 교수’ 운운할 때에야 ‘아참, 내가 장애인이었지‘하고 새삼 깨닫는다. 장애인이 ‘장애’인이 되는 것은 신체적 불편 때문이라기보다는 사회가 생산적 발전의 ‘장애’로 여겨 ‘장애인’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못 해서가 아니라 못 하리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그 기대에 부응해서 장애인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비장애인들의 오만일지도 모른다.”

▲높아져만 가는 빌딩. 이 빌딩의 높이만큼이나 우리의 행복도 높아져갈까.
오늘(3일) 조간신문에서 한국의 2분기 실질 국민총소득 GNI가 1분기에 비해 5.6% 증가해 지난해 2분기 이후 1년 만에 증가세로 돌아섰으며 1988년 1분기에 6.2%가 증가한 이후 21년 3개월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는 보도를 접했다. 이 보도는 한 마디로 ‘이렇게 성장하고 있으니 안심해도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성장이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 잘 살게 될 것이라는 의미인데, 진정 우리가 잘 사는 것이 이처럼 실질 국민총소득이 증가해야만 가능한 것일까.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다니엘 복지원의 아이들을 보면서 적어도 물질의 양이 행복을 결정하진 않는다라는 것, 자동차를 만지고 글자를 읽고, 과자를 먹는 것만으로도 행복에 겨운 아이들을 보며 결국 행복은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아는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알았다. 장애인을 통해 하시는 하나님의 일이란, 고 장영희 교수의 말처럼, 자신을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신체적 능력만을 능력으로 평가하는 오만’을 가르치시는 것이리라.

이틀 간의 짧은 방문. 함께 한 시간이 짧지만 아이들은 이 이방인에게 그들의 마음 전부를 활짝 열어 보여줬다. 그만큼 사랑이 그립고 그리운 아이들이다. 말에 서툴고, 진우처럼 아예 말을 하지 못하는 아이도 있지만, 말을 하면서도 진짜 말은 하지 않는 현대인들보다 그들은 몸과 눈으로 더 진실한 말들을 했다.

멈추기 싫다는 듯 잠깐의 방심에도 그냥 지나쳐버리는 육중한 몸매의 버스를 간신히(?) 불러 세우고 원래 살던 비장애인들의 그곳으로 향하는 동안, 저 멀리 산 속에 묻혀 멀어져가는 다니엘 복지원이 보인다. 많은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드러내야 할 터인데 어찌하여 복지원은 도심에서 벗어나 외딴 곳에 있을까? 우리가 밀어낸 걸까? 더 행복해지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