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故) 장영희 교수. 그녀가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말은 다름아닌 ‘엄마’였다.
“엄마 미안해, 이렇게 엄마를 먼저 떠나게 돼서.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 찾아서 기다리고 있을게. 엄마 딸로 태어나서 지지리 속도 썩였는데 그래도 난 엄마 딸이라서 참 좋았어. 엄마, 엄마는 이 아름다운 세상 더 보고 오래오래 더 기다리면서 나중에 다시 만나.”

고(故) 장영희(57) 서강대 교수가 지난 5월 9일 죽기 직전 병상에서 쓴 마지막 글이다. 장 교수의 어머니 이길자(82) 씨는 소아마비로 두 다리와 오른팔이 마비된 딸을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 등에 업고 학교를 오갔다. 눈이 내리는 날이면 새벽에 일어나 연탄재를 집 앞 골목길에 뿌렸고 화장실에 가야 할 딸 때문에 수업 중간에 교실에 들르는 일도 잦았다.

장 교수는 “운명처럼, 십자가처럼 어머니는 나를 업었다”고 했다. 타계하기 직전 장 교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마지막 말 역시 “엄마”였다. 장애인으로 태어나 세상의 편견과 싸웠던, 아니 그 편견에 쓰러지려는 자신과 끊임 없이 싸워야 했던 그녀에게 ‘엄마’는 두 다리였고 오른팔이었다.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집이 팔렸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갔는데, 어머니는 그 사실을 감춘 채 집주인의 허락을 얻어 내 집인 것처럼 아들에게 밥을 해 먹이고 잠까지 재워 보냈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눈 쌓인 산길을 걸어 이른 새벽 아들을 읍내 차부까지 배웅하고 돌아온다……. 아들과 자신이 걸어갔던 눈길에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었는데, 그 발자국에서 아들의 목소리와 온기가 그대로 느껴져 아들의 발자국만 밟고 되돌아왔다는 것이다. 눈앞이 가리도록 그 발자국 위에 눈물을 뿌리면서.’(이청준 作 소설 「눈길」 中)

엄마……. 아직도 어머니라는 말보다 엄마라는 말에 더 익숙하다. 머리 굵고 나이 찼으니 이젠 어머니라 불러야 격조에 맞건만 마음만은 아직도 엄마라는 단어의 온기에서 더 따뜻함을 느낀다. 아주 어린 시절, 색바랜 흑백사진의 회색빛 기억에는 엄마가 있다. 면역력이 부족해 자주 병치레를 했던 작은 생명을 등에 업고 병원으로 달리던 엄마. 세상에 태어나 저 혼자 공기를 들이쉬며, 기필코 살아내겠다는 다짐이라도 하듯 ‘하악 하악’ 숨을 내쉬던 작은 몸뚱아리에 엄마는 죽도록 몸의 온기를 불어넣었다.

세상에 엄마라는 말에서 눈물 한 번쯤 흘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던가. 엄마는 그런 존재다. 하나님이 이 세상 모든 곳에 다 있을 수 없어서 대신 엄마를 만들었다는 말은 진짜일까 거짓일까. 어머니는 자장면이 싫다고 하셨다는 대중가요의 노랫말은 그냥 노랫말일 뿐인가, 아니면 그 이상의 무엇인가. 과연 누가 이 질문에 거짓이요, 그저 노랫말일 뿐이요 하겠는가. 엄마라는 말은 이미 모든 아들과 딸에게 더이상 설명과 판단이 필요없는 단어일 것이다. 그리고 그래야만 한다.

어머니라는 칭호는 타락되었나?

하지만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만 가는 이 세상은 그 엄마라는 말조차 가슴에서 밀어내고 있다.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어머니라는 칭호는 이미 타락 되었다.’ 한 10대 여중생이 국내의 유명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만들었다는 일명 ‘엄마 안티 카페’의 소갯글이다. 여기에는 “자식을 상처 입혀 괴롭히는 부모가 부모인가. 우린 너희의 노예가 아니야” “탄생시킨 생명을 행복하게 키워나가야 하는 어머니란 존재들은 그 임무를 제대로 수행했다고 보는가”라는 글들이 마치 활화산 터지듯 퍼부어져 있다.

지난 2007년 생성된 이 카페에는 약 1백명이 가입해 있었으며 이들은 욕설은 기본이고, 어머니를 죽이겠다는 협박에, 어머니를 넘어 가족 전체를 향해 분노를 표출하는 글들을 이곳 게시판에 올렸다. 한 언론은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사주지 않아 이 카페를 개설한 것으로 알려졌다는 내용과, 회원들 대부분은 미성년자로 ‘엄마가 컴퓨터 끄고 공부하라고 한다’라는 등의 내용이 나눠지고 있음을 보도했다.

▲엄마 안티 카페의 인터넷 캡쳐 이미지. 지난 2007년 개설된 이 카페에는 엄마는 물론 가족들을 향한 분노의 글들이 올라 있었다.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에서는 자신의 아들을 돌봐준 어머니를 잔인하게 때려죽인 딸이 있어 사람들이 경악했다는 보도도 있었다. 최근 스코틀랜드판 더선 홈페이지에 따르면 스코틀랜드 에어셔(Ayrshire)주에 사는 리사 브라운(22)과 그의 남자친구 존 윌슨(25)은 리사의 모친인 앤 브라운(51) 씨를 살해한 혐의로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았다. 평소 어머니와 관계가 원만하지 못했던 딸이 자신의 아이를 양육해주겠다며 데리고 간 어머니에 불만을 품고 자신의 남자친구와 공모해 어머니를 살해한 뒤 아들을 되찾아왔다고.

천륜을 저버린 패륜이 엄마라는 단어에까지 물을 들일 줄이야. 이전에도 각종 언론 보도를 통해 가족 간 벌어진 비극을 목격했지만 어머니, 엄마라는 말에 유독 방점이 찍힌 사건을 접하고 나니 이런 일이 이전에도 있었던가 잠시 기억을 더듬을 수 밖에 없었다. 그만큼 충격이었고, 모든 것이 ‘갈 데까지 가버린’ 것만 같아 마치 나 자신이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엄마라는 말만은 제발 건드리지 말았어야 했는데 하는 탄식이, 이 보도를 처음 접했을 때 마음 속에 일었는지 모른다. 돌아보니 그랬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이 엄마 안티 카페를 비판하는 무수한 글을 남겨 카페를 폐지시켰다는 소식은, 그나마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여전히 이 사회에는 진정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 같아, 그것에서 위안을 찾았다.

그래서 그녀는 ‘엄마’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또한 이 엄마 안티 카페에 대한 이해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들렸다. 그들은 “잘못된 사고방식과 성인들의 시각 등으로 자신들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해 잘못된 행동을 저지르는 것”이라며 “엄마 안티 카페를 만들었던 아이들 또한 이러한 것의 한 예”라고 했다.

그러면서 부모들의 일방적 자녀 양육 태도와 한국의 입시위주 교육문제에 따른 부모들의 공부강요 등을 예로들며 엄마 안티 카페를 만들 수 밖에 없었던 오늘날 아이들의 현실을 안타까워 했다.

백 번 공감하는 말이다. 자신의 아이가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그들이 지금 무슨 고민을 하며 어떤 대화를 나누길 원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많은 부모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에게 때로 욕을 하고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그래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아이들의 마음에 남기고 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고 사랑에서 떠난 사람들은 그렇게 다른 이를 사랑하는 법을 알지 못한다. 그것이 부모와 자식의 관계라 할지라도.

그럼에도 부모에겐, 특히 극심한 고통 속에서 생명을 탄생시킨 엄마에겐 피붙이를 향한 거절할 수 없는 본성이 있다. 세상이 만들어 놓는 옷에 그 순수했던 마음이 잠시 가려졌지만, 빛나는 금을 아무리 진흙 속에 던져 넣어봐야 금은 그 빛을 잃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형상을 따라 빚으신 엄마에겐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그 마음이 자식을 향한 엄마의 사랑으로 바뀌어 그대로 담겨져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아이들의 자유를 억압하고 일률적인 잣대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이 사회와 그것에 물든 부모들의 행태는 비판하되 결코 ‘엄마’라는 단어의 순수함을 짓밟아선 안 된다. 잠시 가려진 빛을 아예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은 빛인 것처럼 몰아세워 그렇게 나락으로 떨어뜨려선 안 된다는 얘기다.

소중한 생명을 탄생시키는 고귀한 어머니라는 칭호는 과연 타락했는가. 죄로 인해 우리 인간은 타락했을지언정 그 안에 담아두신 하나님의 형상까지 과연 타락해버렸는가. 깊이 생각해볼 일이다.

이 글의 처음에서 언급했던 장 교수는 어둡고 침침했던 이 세상, 아니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라 여겼던 이 세상을 환하고 밝게 살아간 사람이다. 기자 역시 그녀의 책 「내 생에 단 한번」을 읽은 적이 있다. 그녀는 이 책에서 가난한 할머니를 도와준 제자의 따뜻한 마음에 과감하게 A+를 주고, 불행한 삶에도 나름의 가치와 희망이 있음을 끊임없이 증거해주고, 화려한 것보다는 낡고 더러운 것에 더 애착을 느끼고, 유치한 연애편지 속에서 인간의 가장 소박하고 진실된 마음을 읽을 줄 아는 마음을 노래한다.

장애인의 몸이면서도 그녀는 세상을 똑바로 걸었고 모든 존재들에 따스한 손길을 더해 나갔다. 정상인의 몸을 가졌음에도 절룩거리고 차디찬 손을 휘둘렀던 많은 사람들 속에서 말이다. 그런 그녀가 하늘로 가면서 이 세상에 ‘엄마’라는 말을 남겼는데, 남겨진 우리는 이 말을 더욱 소중히 지켜가야 하지 않을까. 절룩거리는 발이 중심을 잡고 차가웠던 손에 다시 온기가 오르려면 우리는 꼭 그래야 한다. 아마 그러라고 그녀도 그랬을 것이다. 이 세상엔 반드시 지켜져야 할 것이 있다고. 그래서……, 그래서 ‘엄마’라는 말을 남겼을 것이다.

▲많은 것들이 무너져버린 이 세상, 우리가 끝까지 지켜야 할 것들 중에 엄마도 있다. 우리는 엄마를 버리면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