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해운대’(감독 윤제균)를 봤다. ‘쓰나미가 부산의 해운대를 덮친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이 영화의 가장 큰 명장면은 두말 할 것도 없이 거대한 쓰나미가 초고층 빌딩들을 순식간에 삼켜버리는 부분이다. 헐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들을 통해 이미 그러한 장면에 익숙해졌지만, 국산 쓰나미의 위용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영화를 처음 기자들에게 선보이는 자리에서 윤제균 감독은 “이 영화엔 ‘쓰나미만’ 있는 것이 아니라 ‘쓰나미도’ 있다”고 했다. 사람들의 관심이 온통 쓰나미에 쏠렸으니, 혹 다른 것을 놓치고 그것만 볼까봐 걱정이 됐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태평양을 건너온 로봇들이 마치 진짜인양 우리들을 현혹하며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허물었으니 말이다.

쓰나미를 재현해낸 그래픽의 완성도를 논하고 싶진 않다. 그보다는 감독의 요청대로 영화 속 살아있는 캐릭터들의 구수한 인생 드라마와 그 속에서 보여지는 삶의 한 단면을 음미해보고 싶다(매주 설교를 듣고 성경을 읽지만 가끔은 영화에서 온 짧은 묵상이 꽤 오래 마음을 붙잡아둔다. 하정완 목사님도 아마 그래서 영화로 설교하시는 걸까). ‘구수하다’고 표현한 건 영화의 배경이 부산이라 배우들이 사투리를 쓰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에게 보다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놔라 가시나야’ ‘이 손 놓으면 직이삔데이’ 등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그들은 더 이상 설경구 하지원이 아닌 최만식 강연희다.

▲ 영화 ‘해운대’는 너무나 인간적인 부산 사람들의 이야기이자 곧 우리들의 이야기다. 그래서 그들을 덮친 쓰나미가 더욱 더 깊은 메시지로 우리 가운데 다가온다.
영화에는 땀냄새 풀풀 나는 인간 군상들이 저마다의 사연을 품은 채 옹기종기 살아가고 있다. 한때 어부였지만 지금은 생선가게를 운영하는 소심한 최만식(설경구 분), 아버지를 잃고 홀로 장사를 하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강연희(하지원 분), 순진하지만 용감한 구조대원 최형식(이민기 분)에 해운대에 놀러온 깍쟁이 삼수생 김희미(강예원 분)까지 우리의 오빠 동생 친구, 그리고 혹은 나 자신일지도 모를 그들이 따뜻한 해운대를 만들어 간다.

쓰나미는 거대하고도 잔인하게 모든 것을 휩쓸어갔지만 해운대의 그들은 이 시련을 통해 오히려 서로에 대한 감정을 더욱 깊이 확인해간다. 작은 오해는 더 큰 사랑에 덮여버렸고, 진심을 가렸던 허영은 그저 허영일 뿐이었다. 아내의 생사를 확인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물에 휩쓸린 사랑하는 사람의 손을 필사적으로 붙들면서, 그들의 상처난 마음엔 어느새 새살이 돋았고 서로를 향한 그리움엔 선명한 힘줄이 섰다.

결국 남는 것은 사랑과 믿음 소망

갑자기 달려들어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리는 자연의 대재앙. 영화 ‘해운대’ 역시 그러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컴퓨터 그래픽의 힘을 빌어 스크린 속에서나 일어날 일쯤으로 넘기기엔, 우리는 너무나 많은 참사를 각종 미디어를 통해 목격해왔다. 해마다 그 양이 많아지는 비는 가옥과 거리를 장마 때마다 덮치고, 인간에 화가 났는지 이 지구는 점점 더 뜨거운 열기로 우리들을 숨막히게 하고 있다. ‘해운대’ 역시 지난 2004년 역사상 유례없는 최대의 사상자를 내며 전세계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준 인도네시아 쓰나미를 상상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만식의 삼촌(송재호 분)이 손가락질 받아가며 악착같이 돈을 긁어 모아도, 한 몫 챙기기 위해서라면 누군가의 비밀쯤은 사정없이 까발려도 아무렇지 않은 오동춘의 그 이기적인 모습도, 입을 벌린 쓰나미 앞에선 한낱 부질없는 인간의 어리석음이자 헛된 탐욕일 뿐이었다.

재미있었다. 자연스런 사투리는 중독성이 있었고, 점도 높은 드라마 전개는 영화의 질감을 더했다. 생각하게 했다. 어제가 오늘이 되고 오늘이 다시 내일이 되는,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도 다 허상이 아닐까. 몇 세기에 걸쳐 이룩한 문명의 이기도 태초부터 있었던 자연 앞에 그저 초라하고 무기력하기만 한 것을. 결국 남게 되는 건 서로에 대한 사랑이며 믿음과 소망이라는 걸 이 영화는 웅변하는 듯했다. 지루할 새 없이 재미있었고 다 본 후에는 잠시 자리에 앉아 음미한 영화를 본 건 오랜만이었다.

▲ 좌우로 나눠 서로 대립하고, 드라마와 각종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통해 TV 화면은 성(性)과 폭력을 아무렇지 않게 투시한다. 그러나 거대한 파도는 그렇게 더러운 것들을 쓸어버리고 오직 우리 마음의 순수한 것들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때리고 버리고 심지어 살해까지 하는 패륜이 벌어지고 사이버 세상,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며 온갖 만행을 저지르는 다중 인격자들이 양산되고 있는 시대(주간조선 2065호 보도), 부부 간 성폭력, 의붓남매 간의 키스, 청부살인 등을 이야깃 거리로 삼는 드라마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하는 시대, 어지간한 성적 묘사는 화편 윗쪽에 ‘19’만 표시하면 그만이고 웬만한 욕설과 폭력 장면은 감초처럼 드라마나 영화에 삽입되는 그러한 시대.

정치인들의 구설은 끊이지 않으며 보수와 진보, 우파와 좌파의 갈등은 이제 한 나라의 수장을 지낸 이까지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있다. 한 연예인의 자살은 여성을 상품화하고 모든 것을 돈으로 계산하는 인간의 죄악을 고발했고, 정치인에서 기업인 심지어 종교인까지 연루된 ‘로비’는 어느 목사가 말한 ‘깨끗한 부자’란 이 세상에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를 조롱하는 듯하다.

하나님을 믿는 이들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성직이라는 목회자들은 ‘정치’라는 세속의 단어 앞에 얼룩져 있고 돈과 명예, 때론 염문들에 휩싸여 교회 밖으로부터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곤 한다. 신앙을 가졌다는 연예인들이 고통의 피난처로 교회가 아닌 자살을 선택하는 걸 보면 세속과 다름없는 차별과 시선이 여전히 교회에도 존재하는 것같아 마음이 아프다.

그런데 나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은 두 주인을 섬기지 말라 하셨는데, 또 다른 나는 지금도 주님의 너른 품이 아닌 해운대의 푸른 바다가 구원의 장소인양 달려가고 있다. 재물을 쌓아둔 어리석은 자에게 하셨던, 오늘밤 생명을 취하리라는 주님의 그 말씀을 잊고 오늘도 많은 사람들은 갖가지 허상과 재물들을 쌓아가고 있다. 그렇게 쌓여진 것을 보고 흐뭇한 듯 웃지만, 해운대를 찾았던 백만의 사람들의 웃음을 한 순간 앗아갔던 쓰나미를 그 누가 알았단 말인가.

거대한 파도는 그렇게 더러운 것들을 쓸어버리고 오직 우리 마음의 순수한 것들만을 남겨놓을 것이다. 영화 ‘해운대’는 대중들을 위한 대중영화지만 크리스천들에게 더 많은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 적어도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 이들에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