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유명한 영화평론가는 “적어도 영화를 논하는 자라면, 영화를 두 번 보는 것에 두려움을 가져선 안 된다”라고 했다. 기억을 더듬었더니, 과연 옳은 말이다. 주옥 같은 대사, 장면과 장면을 잇는 카메라의 앵글,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결코 한 번에 음미할 수 없음이 당연함에도, 으레 두 번 보는 ‘두려움’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인간의 이중성은 언제나 그렇듯, 쉽게 없어지지 않는 것이어서 좋은 영화를 보기 전에는 항상 “몇 번이고(대부분 두 번 이상이었던 것 같다) 다시 보리라”는 약속을 나 자신과 서슴없이 해버린다. ‘화장실 들어갈 때 다르고 나올 때 다르다’더니….

이러한 현상은 이야기가 짜임새 있고 등장인물들이 서로 밀착돼 끈끈함이 있으며 캐릭터는 조밀하고 배경의 스케일이 클수록 두드러진다. 한 마디로 ‘좋은 영화’를 대할 때마다 이 ‘두 번의 법칙’이 밀려온다는 얘기다. 단순한 스트레스 풀이용 영화(결코 나쁜 영화라는 의미가 아니다.)를 두 번 이상 본 것은 순전히 재미가 있어서이지, 그 의미와 메시지를 묵상하기 위함이 아니었다.

‘터미네이터’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터미네이터2-심판의 날’에 바로 이 ‘두 번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혹 반대할 사람이 있을까.(아, 무슨 두 번 뿐이냐고, 더 봐야 한다는 사람은 있을 수 있겠다) 한 번에 삼킬 수 없는 2시간 19분의 긴 런타임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시리즈를 통틀어 가장 혁신적이면서도 심도 있게 스토리를 끌고간다는 점이 이 영화의 리플레이를 가능케 한다. 영화는 시종일관 무겁게 다가오며 인물들의 내면 묘사와 사건의 긴장감은 더욱 세밀하다. 총 네 편의 터미네이터 시리즈가 나왔지만 여전히 이 두번째 편을 따라잡진 못했다.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존 코너는 인류의 미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미래 인류를 위해 선택된 자이며, 터미네이터가 그 자신을 용광로에 던질만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인물이다.
영화는 기계들의 우두머리인 ‘스카이넷’이 저항군 사령관인 존 코너를 처치하기 위해 새로운 기종의 액체 금속 인간 ‘T-1000’을 과거로 보내면서 시작된다. 미래의 존 코너 역시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를 보호하기 위해 사이보그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고, 터미네이터와 T-1000은 서로의 임무를 완수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를 벌인다. 최근에는 시리즈 네번째 편인 ‘터미네이터4-미래전쟁의 시작’이 개봉되기도 했다.

존 코너는 인류의 미래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다. 인류 말살을 목표로 하는 기계 군단에 맞서 인간 저항군을 이끌어야 할 사명이 그에게 있기 때문이다. 만약 과거의 그가 죽는다면 미래의 인류는 커다란 비극에 직면할 것이며, 이 사실을 너무나 잘 아는 스카이넷과 미래의 존 코너는 서로의 터미네이터를 과거로 보내는 것이다. 선택 받은 자. 영화에서 존 코너의 운명을 이 말로 설명할 수 있다. 그는 미래 인류를 위해 선택된 자이며, 터미네이터가 그 자신을 용광로에 던질만큼 반드시 살아남아야 할 인물이다.

그들은 왜 마음대로 죽을 수도 없는가

사실 선과 악의 대립을 주된 모티브로 하는 영화는 대부분 이 ‘선택’이라는 형식을 알게 모르게 영화에 삽입한다. 그런 영화들에서 악에 맞서는 주인공들은 이 선택이라는 과정을 거치게 마련인데, 그것은 혹독한 수련을 거치는 과정일 수도 있고 아예 처음부터 어떤 보이지 않는 힘에 의해 숙명처럼 정해진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영화 중 하나로 ‘반지의 제왕’을 들어보겠다.(굳이 이 영화를 선택한 건, 이 영화가 ‘선택 받은 자’인 주인공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주인공 ‘프로도’는 유일하게 절대 반지에 유혹되지 않는 강한 내성을 지니고 있으며, 그러한 이유로 ‘반지 운반자’로 선택 받는다. 그는 온갖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절대 반지를 파괴하는, ‘선택 받은 자’로서 자신의 사명을 완수한다.

그 외에도 선택 받은 자로 주인공이 등장하는 영화는 무수히 많다. 수퍼맨 시리즈를 비롯한 배트맨 시리즈와 스파이더맨 스리즈 등 ‘맨’류의 영화가 대부분 그렇고, 매트릭스 시리즈의 네오, 해리포터 시리즈의 해리포터, 레지던트이블 시리즈의 앨리스, 트랜스포머 시리즈의 샘, 아이 로봇의 써니, 원티드의 웨슬리, 나는 전설이다의 네빌, 애니메이션으로 치자면 인크레더블의 수퍼 패밀리 등에 이르기까지 그 종류가 다양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바로 선택 받은 자가 겪는 내면적 갈등이다. 최근 영화들은 보다 현실적 감각을 유지하기 위해 선택 받은 자들의 ‘순종’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기도 하고 나약한 자신의 모습에 용기를 잃기도 한다.

▲영웅이고 싶지 않았던 존 코너는, 그러나 결국 터미네이터가 자신의 운명임을 깨닫고 미래 전쟁을 준비한다.
영웅이고 싶지 않았던 존 코너는 자신을 지키려는 터미네이터로부터 도망치려 하지만, 터미네이터가 곧 자신의 운명임을 깨달은 후에는 그에게 연민을 느끼며 미래의 전쟁을 외로이 준비한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의 어머니인 사라 코너 역시 자아정체성의 혼란을 겪으며 존 코너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 자꾸만 반지의 유혹에 빠져드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마음이 나약해진 프로도 역시 밀려오는 불안감에 모든 것을 벗어던지고 돌아가고 싶지만, ‘샘’을 비롯한 주변 친구들의 도움을 발판삼아 다시금 일어선다.

이렇게 자신이 선택 받은 자임을 깨달아가는 과정에서 그들은 점차 자신을 ‘나’와 ‘선택 받은 자’로 분리해 나간다. 내가 ‘나’일 때는 두려움과 불안함, 내가 원하는 것과 받아드릴 수 있는 것에 보다 민감했던 반면, 내가 ‘선택 받은 자’임을 깨달은 후에는 그러한 모든 감정들과 싸우며 보다 이타적이고 객관적인 자아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두려움을 넘어선 용기와 불안함을 이기는 믿음을 갖게 되고, 내가 원하는 것과 받아드릴 수 있는 것에서 남을 위하는 것과 받아드려야만 하는 것으로 눈을 돌리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함부로 죽을 수도 없다. 죽어서도 안 된다. 자신의 생명이 더 이상 자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인기를 누리고 있는 영화 ‘트랜스포머2-패자의 역습’에도 이렇게 ‘죽을 수 없는’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악의 무리인 ‘메가트론’에 맞서 지구를 구하는 ‘오토봇’ 군단의 대장 ‘옵티머스 프라임’은 극의 초반부에서 적과 전투 중 죽지만, 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이들의 바람에 따라 다시 살아난다. 죽임을 당해도 다시 살아나야 할 운명에 처한 것이 바로 ‘선택 받은 자’의 어쩔 수 없는(?) 삶인 셈이다.

“생명 끊을 권리가 우리에겐 없다”

서설이 너무 길었다. 이제 진짜 얘기를 해보겠다. 우리는 선택 받은 자인가. 무슨 뜬금 없는 소리인가 하겠지만, 지금까지 영화들을 언급하며 던지고 싶었던 물음이 바로 이것이다. 나에겐 영화의 주인공들처럼 어떤 특별한 능력도, 그리고 마치 모든 이들이 나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것과 같은 그런 특별한 환경에 놓여있지도 않지만, 그럼에도 나라는 생명이 과연 선택 받은 존재가 될 수 있는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우주과학자는 “우주 모든 만물 가운데 인간으로 태어날 확률은 마치 작은 콩을 땅에 흩뿌린 후 하늘에서 바늘을 떨어뜨려 그 콩 위에 정확하게 꽂힐 확률과 같다”고 했다. 이렇게 보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그야말로 엄청난 확률에 따라 태어난 ‘선택 받은 자’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렇지 않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선택 받은 자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한복음 15장 16절)

이러한 의식이 있는 크리스천이라면, 꼭 영화의 주인공처럼은 아닐지라도 그와 비슷한 의식이 있어야 한다. 내가 하고 싶은 것보다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에 더욱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존엄사’ 국내 첫 사례로 기록된 김모 할머니(77)가 지난 달 대법원 판결에 따라 호흡기를 뗐지만, 여전히 정상적인 호흡을 하며 고귀한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혈압과 맥박, 체온 등이 모두 정상이라고 한다. 호흡기를 떼면 괴로운 삶에서 벗어나 평안한 안식의 세계로 들어갈 줄 알았는데, 마치 생명의 끈을 놓을 수 없다는 창조물의 몸부림처럼, 호흡기를 뗀 김 할머니의 코와 입술은 그렇게 대기의 에너지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생명을 누릴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나, 그 생명을 끊일 수 있는 권리는 없다.
김 할머니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지만 하나님을 믿는 한 의사의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는 “살아있는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누릴 수 있는 권리가 인간에게 있으나, 그 생명을 끊을 수 있는 권리는 없다”고 했다. 내 생명을 나 스스로 끊는 일도 있을 수 없거니와 남의 생명을 함부로 판단하는 행위 또한 결코 용납될 수 없다는 말이다.

존 코너의 연약함을 너무나 잘 알고, 프로도의 두려움을 너무나 잘 알지만 어머니 사라 코너는 그의 아들에게 미래의 진쟁을 준비시키고, 샘 또한 눈물을 흘리며 프로도에게 다시금 원정의 길을 촉구한다. 평안한 죽음을 원했으며, 살아생전 그와 같은 말을 무수히 많이 했다고 한들 우리들은 결코 ‘선택 받은’ 생명의 사명을 잊어선 안 된다. 그 사명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우리 각자가 주어진 생명을 최선을 다해 살아내는 동안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문제이며, 이미 그러한 삶을 살았던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기에, 우리 모두는 존 코너가 되고 프로도가 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하며 끝까지 지킬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순간에도 병상에서 또는 가정에서 투병 중인 수많은 환우들이 있습니다. 이 분들의 투병의지를 일깨우고 격려하는 것이야말로 인간의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한 최선의 방편일 것입니다.”(존엄사 시행관련 세브란스병원 대국민 발표문 中)

반지 운반자 프로도는 끊임 없는 혼란과 절망의 소용돌이 속에서 선택 받은 자로서의 운명을 거부하려 하지만 그 때마다 샘은 그를 옆에서 도우며 어려움을 함께 한다. “샤이어를 기억하세요? 곧 봄이 올거에요. 나무에는 꽃들이 필거구요. 농작물을 수확하겠죠. 수확한 딸기로 잼을 만들어 먹을 거에요.……, 그럼 반지를 파괴하자구요. 영원히요. 나리의 것을 들어드릴 수는 없어요. 하지만 나리를 들어드릴 수는 있어요. 어서가요!” 우리가 생명을 포기하려 할 때 누군가 이렇게 속삭인다면……. 아, 오늘은 이 영화들을 한 번 ‘더’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