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어렸을 적 기억의 한켠에 알록달록 테잎 하나가 있다. 총각이었던 삼촌과 한 집에서 살았는데, 삼촌의 테잎이었다. 디스코. 그 땐 그 테잎을 그렇게 불렀다. “삼촌 디스코 틀어줘!”. 아침에 눈만 뜨면 삼촌을 졸랐다. 부엌에선 엄마가 시끄럽다고 난리였고, 마루에 앉으신 할머니는 정신 없다며 한사코 끄자셨지만, 꼬마는 멈추지 않았다. 세상에 이렇게 신나는 노래가 또 있을까. 그 때를 떠올리면 햇살이 따뜻했던 작은 방에서 혼자 춤을 추고 있는 시골 꼬마가 떠오른다.

나중에야 알았다. 디스코라 불렀던 그 테잎의 음악이 바로 마이클 잭슨의 작품이었다는 것을.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은 내게 그런 기억으로 남아있다. 태평양을 건너, 한국이라는 작은 반도의 나라. 그것도 한 시골 마을의 꼬마에게까지 닿았던 그의 노래에는 먼 거리를 날아올 만큼의 충분한 에너지가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가슴을 태우는 연료, 그래서 아픈 현실에서 벗어나 잠시나마 자신의 꿈을 불태울 수 있게 해준 그런 에너지가.

마이클 잭슨의 영결식이 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의 스테이플 센터에서 열렸다. 수많은 사람들이 왔고,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그가 남긴 족적이 컸던 만큼 그가 떠난 빈 자리 역시 그 어떤 이들의 것보다 컸다. 동료 가수들은 그의 히트곡들을 부르며 그리움을 달랬고, 기자 역시 어린 시절 소중한 추억이 되어준 ‘디스코’의 주인공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마이클 잭슨. 팝의 황제의 마지막 인생은 수많은 스캔들로 얼룩져 있었다. 평화와 사랑을 노래했던 그였기에 그런 사실이 더 슬프다. 지난 7일 많은 사람들의 애도 속에 그의 영결식이 열렸다.
스타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

그러나 사실 마이클 잭슨의 마지막은 온갖 스캔들로 얼룩져 있었다. 성형 중독설을 비롯해 아동 성추행과 아동 학대에 이르기까지 그와 관련된 뉴스는 대부분 ‘배드’(bad) 뉴스였다. 그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간에 그러한 소문들은 그에게 분명 고통을 주었을테고, 죽기 전 그의 마지막 인생이 얼마나 힘든 것이었는가를 어느정도 짐작케 해준다.

전 세계 많은 이들에게 노래로 꿈과 희망을 선물했고, ‘We are the world’ ‘Heal the world’ 등을 부르며 인류에 평화와 사랑을 호소했음에도 왜 그의 인생은 그렇게 어두웠던 것일까. 얼굴에 마스크를 하고, 마치 동물원에 갇힌 것마냥 사람들의 눈을 의식하며 머리를 숙인 채 걷는 그의 모습이 TV 화면에 비칠 때면, 그것이 스타로 사는 이들의 어쩔 수 없는 숙명인 것만 같아 왠지 마음 한 구석이 씁쓸했다.

‘숙명’이라는 말을 꺼낼 정도로 스타, 즉 연예인들의 삶은 우리가 아는 것처럼 그렇게 화려하지도 또 그렇게 행복하지도 않은 것 같다. 미남 미녀들은 왜 그렇게도 많이 만났다가 헤어지기를 반복하는 것이며, 왜 그렇게도 많이 마약이나 대마초, 도박 관련 루머에 연루되는 것일까.

특히 최근 연예인들의 잇단 자살을 접하면서 그같은 생각이 더욱 머릿속을 맴돈다. 한 시대를 풍미하며 ‘미인’의 대명사였던 배우 최진실 씨가 사랑하는 아이들을 남겨둔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재치있는 입담과 쾌활한 성격으로 웃음을 줬던 배우 안재환 씨도 쓸쓸히 인생을 마감했다. 최근에는 인기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 출연했던 배우 장자연 씨의 자살로 연예인들의 인권 실태가 드러나 세간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노예 계약’이니 ‘성 상납’이니 하며 거론된 연예인들의 실제 삶은 우리가 상상했던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꿈을 좇아 별이 되겠다 다짐했던 그들은, 정작 다른 사람들에겐 아름다운 별빛을 선물했을지언정 자신은 그 빛을 만들어 내느라 점점 빛을 잃어갔던 건 아니었을까. 이제와 돌아보니 사진 속의 마이클 잭슨의 눈빛이 그리도 슬퍼 보일 수 없다. 자료 화면 속 최진실 씨의 환한 웃음에 마음이 아프고, 안재환 씨의 미소는 눈물을 감추려는 처절한 몸부림처럼 느껴진다.

▲자신들을 사랑해주는 많은 팬들이 있었음에도 왜 스타들은 자살을 선택할까. 그러나 작은 실수에도 환호는 야유로 바뀌고, 인격은 컴퓨터 키보드의 글자 몇 개로 금새 정의돼 버린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야유로 쉽게 바뀌는 그런 환호라면…

한창 연예인들의 자살이 이어졌을 때 김진홍 목사는 “안재환 씨의 자살은 사업실패로 인한 부채 때문이라 하고 최진실 씨는 인터넷에 뜬 악플이 원인이라고들 한다”며 “그러나 그런 이유는 피상적인 이유일 수밖에 없다. 그런 일들로 자살을 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에 자살해야 할 이유를 지닌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했다.

그러면서 김 목사는 “사람은 아무도 사랑할 상대가 없을 때에 자살한다. 그에게 친구가 있고,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며 그가 사랑할 사람이 있으면 그는 살아갈 것”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그의 말 중에 ‘그를 사랑해 주는 사람이 있으면’이라는 말이 참 아이러니하다. 최진실 씨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없었겠는가. 안재환 씨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왜 없었겠나. 그들이 죽은 후 많은 동료들과 그들의 팬들은 “사랑했었다”는 말을 수없이 남겼다. 그렇다면 그들은 생전 이 사실을 전혀 몰랐다는 말인가. 그건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럼 그들은 왜 자신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 있었음에도 죽음을 택했을까.

알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춤과 노래, 연기에 환호하는 그런 팬들이 있다는 걸. 그러나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환호와 함성으로는 채워도 채워도 마음이 다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은 실수라도 하면 환호는 어느새 야유로 바뀌었고, 사생활과 인격은 컴퓨터 키보드의 글자 몇 개로 가볍게 정의되기도 했다.

잠시 미국의 씨씨엠(CCM) 아티스트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의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그는 1987년 데뷔 이래 지금까지 총 19장의 앨범들을 발표하며 씨씨엠의 한 길만을 걸어온 미국의 대표적 아티스트다. 그가 유명한 건 물론 빌보드 차트 1위 자리까지도 올랐던 히트곡 때문이지만, 많은 아이들을 입양해 그들에게 사랑을 베풀며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기 때문이다. 그는 말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깨닫게 됐다”고.

▲미국의 대표적 씨씨엠 아티스트인 스트븐 커티스 채프먼. 지난 20여 년간 씨씨엠의 한 길만을 걸으며 그는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는 자신이 왜 노래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분명히 알고 있다. ⓒ크리스천투데이 DB
스티븐 커티스 채프먼의 얘기를 꺼낸 건, 그가 씨씨엠 아티스트로 하나님의 사랑을 노래하고 또한 하나님의 사랑이 그가 노래하는 이유라는 점 때문이다. 물론 그가 대중들의 인기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단정지을 순 없지만, 최소한 그것이 없다고 한들 그에겐 자신이 왜 노래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이 있다. 그에게 노래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알아가는 과정이면서 동시에 사랑을 실천하는 행위인 것이다. 미국과 한국을 막론하고 씨씨엠 아티스트들이, 기자가 쓴 것처럼 ‘아티스트’라는 말 대신 ‘사역자’라는 말을 더 많이 쓰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교회에서조차 ‘연예인’으로만…

세계적인 소프라노 조수미 씨는 한때 이런 말을 했었다. “내게 있어 가장 힘든 시간은 공연이 끝나고 큰 박수 속에서 무대를 내려왔을 때”라고. 누군가는 그 박수를 좇아 평생을 달린다. 그 박수에 울고 웃는 이들이 연예인들이다. 그런데 또 누군가는 그 박수를 받은 후가 제일 힘들었다니……, 막상 박수를 받고 보니 그까짓 것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이것을 위해 달려온 자신의 삶이 헛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을까. 알 수 없지만 짐작컨데 둘 다인 듯하다.

많은 연예인들이 시상식장에서 입버릇처럼 “하나님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린다”고 말한다. 고 최진실 씨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그들의 삶이 그토록 슬퍼 보이는 것일까. 배우이자 목사이기도 한 임동진 씨는 교회에서조차 연예인은 연예인으로만 ‘취급’된다고 했다. 한 사람의 인간 한 마리의 어린 양이 아닌, 여전히 많은 사람들 앞에서 웃어줘야 하고 손을 흔들어줘야 하는 그런 연예인으로 말이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마이클 잭슨을 따라다닌 좋지 않은 스캔들이 많았으나 사람들이 그것을 기억지 않았으니 정말로 다행이다. 마이클 잭슨의 영결식은 슬픔과 비통함의 자리였다기 보다 한 시대, 한 세상에 노래로 꿈과 희망을 선물하고 간 한 사람을 하늘로 떠나보내는 작은 고별 콘서트와도 같은 분위기였다. 그의 히트곡들 속에서 아련했던 지난 날의 추억들을 떠올리며 그렇게 사람들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마이클 잭슨을 떠나보냈다.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 얼마 전 연예인 인권실태 조사를 공개했다. 더이상 겉과 속이 다른 연예계의 두 얼굴을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얼마 전 한국방송영화공연예술인노동조합이 연예인 인권실태 조사를 공개했다. 연기자 191명 가운데 89%가 직접 인권침해를 받은 적이 있거나, 피해를 당했다는 얘기를 동료들로부터 들은 적이 있다고 답했다. 인권침해의 구체적 내용을 묻는 질문에는 응답자 304명 중 금품요구가 25.7%, 인격모독이 23.7%였다. ‘장자연 자살’로 드러난 접대와 성 상납도 각각 20.7%, 11.5%나 됐다.

많은 언론들이 ‘충격’이라는 단어를 써가며 이러한 조사내용을 보도했지만 기자는 별로 큰 충격을 받지 않았다. 충격이라는 단어는 전혀 몰랐던 사실(주로 나쁜 소식)을 갑자기 접했을 때 쓰는데, 연예계의 화려함 뒤에 있는 그림자를 기자는 어느 정도 짐작했기 때문에 이 조사가 그다지 충격적이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짐작은 다분히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경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만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 줄 수 있으며, 주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갈급한 마음에 생수가 될 수 있음을. 대중의 박수갈채를 좇고 화려한 무대 위의 삶을 꿈꾸는 그러한 삶의 이면이 어떤 모습이 될 것이라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에 비출 때 명백하다.

국내 한 언론은 사설에서 “당국의 철저한 감시 감독과 처벌, 방송과 매니지먼트사의 자성과 함께 연예인 자신이 맹목적 스타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격을 지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썼다. 스타지상주의에서 벗어나 스스로 인격을 지키려는 노력은, 그러나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스타지상주의’라는 말자체가 이미 개인의 노력 범위 수준을 벗어난 한 공동체, 나아가 한 사회에 적용되는 말이기 때문이다. 겉은 화려하지만 속은 곪아가는 연예계의 그 두 얼굴을 이제는 더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그들이 더이상 슬퍼지지 않았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