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교회사).

 

Ⅰ. 문제제기
Ⅱ. 현행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종교 서술의 구조와 개신교
Ⅲ. 한국 국사교과서에 나타난 개신교 이해의 변화
Ⅳ. 근대문명의 유입과 개신교(2)

하지만 1982년 출판된 제4차 국사교과서부터 한국 최초의 근대 교육기관은 배재학당이 아니라 원산학사라는 것이 강조되기 시작한다. “근대 교육은 개화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덕원 주민들은 개화파 인물들의 권유에 의하여 원산학사를 세워 근대학문과 무술을 가르쳤다(115)”고 기록한다. 민족주의 역사학자들은 원산학사가 1883년 설립됐으며, 이것이 한국 최초의 자생적 근대 교육기관이라고 주장한다. 현행 국사교과서는 원산학사의 교육에 대해서는 도움글을 통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318). 하지만 원산학사가 얼마나 한국의 근대교육에 기여했는가는 아직도 의문의 여지가 많다. 실제로 원산학사는 뒤에 전개된 한국 근대교육의 모델이 되지는 못했다.

원산학사를 학계에 한국 최초의 근대식 교육기관으로 소개한 것은 서울대 신용하 교수다. 신 교수가 1974년에 쓴 이 논문은 기독교식 근대교육을 서구 제국주의 식민 정책의 하수인으로 보는 민족주의자들에게 큰 복음이었다. 이제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근대교육이 서구인들에 의해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한국인에 의해 시작됐다고 주장한다.

원산학사, 향교 교육의 연장… 근대 교육과 거리 멀었다

그러면 원산학사는 무엇인가? 1883년 음력 8월 28일 개항장 원산에서 덕원부사는 원산학사가 이미 관민 합동으로 설립됐다고 보고하면서 정부를 향해 과거에 혜택을 줄 것을 건의했는데, 이것이 바로 근대식 교육의 출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1885년 세워진 배재학당 보다 먼저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원산학사가 과연 근대식 교육기관이었는가는 논란이 있다. 정재걸의 연구에 의하면 원래 원산학사의 교과 과정은 근대 교과과정이 아니었다고 주장한다. 전통적인 교육을 답습했다는 것이다. 덕원부사가 정부에 올린 장계에 의하면 문사의 경우 ‘경의(經義)’를, 무사의 경우 병서를 가르치고, 이후 ‘시무에 긴요한 것을 가르치도록’ 돼 있다. 여기는 ‘산수, 격치로부터 각종 기기 및 농잠, 광체에 이르기까지’라고 돼 있다. 그런데 이런 시무에 필요한 교육은 이미 향교 교육의 연장이었으며, 근대 교육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신용하 교수는 <춘성부지> 홍학조에 나와있는 학교 비치용 도서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들은 영지 6권, 연방지 2권, 기기도설 2권, 일본 외국어학 1권, 법리문 1권, 대학 예비문 1권, 만국공법 6권, 농정신편 2권이다. 하지만 정재걸의 연구에 의하면 이 책들이 원산학사 개교 초기에 학교에 비치됐다는 증거가 아무것도 없고, 오히려 그 책들의 출판연도를 살펴볼 때 개교 2년 뒤에나 학교에 비치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것이다.

실제로 원산학사는 근대 교육기관이라기보다 과거를 위한 준비교육 기관이었다. 원산학사에 대해 최초로 논문을 발표한 신 교수도 원산학사가 이후 어떻게 발전했는지 알 수 없으며, 단지 갑오경장 이후 국가 교육제도에 의해 원산소학교로 바뀌었고, 따로 역학당을 만들어 외국어 교육을 시킨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한다. 따라서 원산학사가 한국의 근대교육에 미친 영향을 미미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개신교 근대교육은 수많은 사립학교들의 모델

여기에 비해 개신교의 근대교육은 뒤에 나타나는 수많은 사립학교의 모델이 됐다. 하지만 국사교과서는 근대 교육에 미친 개신교의 역할을 축소해 설명하고 있다. 현행 국사교과서는 개신교의 근대교육에 대해 단지 “한편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를 목적으로 사립학교를 세워 근대학문을 교육하였으며(318)”라고 언급할 뿐이다. 여기에는 학교 이름도 나오지 않고, 전에 언급하고 있던 개신교가 민족교육에 이바지했다는 부분도 다 삭제됐다. 이들은 개신교 교육이 단지 선교를 위한 목적이었으며,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해 노력한 것은 언급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아울러 개신교 교육을 갑신정변 이후 반포된 교육개혁 이후에 삽입함으로서 개신교 교육이 갑오개혁 다음에 일어난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도 한다. 배재나 이화의 근대교육은 갑오개혁 이전에 시작됐다.

이같은 한국 근대화에 미친 개신교 역할에 대한 축소는 한글 보급에서도 드러난다. 원래 1968년 국사(이원순)는 한글 보급에 미친 기독교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국문 보급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그리스도교였다. 천주교는 1862년부터 각종 교리서를 순 국문으로 보급하였으며, 또한 프랑스 신부에 의하여 우리 말과 서양 언어와의 최초 사전인 [나한사전], [한불자전]의 사서와 [한어문전]이라는 우리역사를 최초의 서양언어학적 입장에서 쓴 국문 문법서가 편찬된 바 있다. 프로테스탄트도 성서와 찬송가를 순 국문으로 발간하여 은연중에 한글을 보급하였다.(1968)”

사실 한글 보급에 있어 천주교와 개신교 가운데 어느 종교가 더욱 큰 기여를 했는가는 연구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다. 필자의 생각으로 개신교는 원래 성경 공부를 강조하는 종교이기 때문에 개신교의 성경 보급은 글자 그대로 한글 보급이었다. 개신교는 권서제도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에 성경을 보급했다. 이것으로 개신교가 한국 사회의 한글보급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뒤에 출판된 국사교과서는 한글 보급에 끼친 개신교의 기여를 전연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근대 의식이 자라면서 민족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따라서 국어에 대한 관심을 갖게 됐다고 추상적으로 설명하고 있을 뿐이다. 이것은 현행 국사교과서도 마찬가지다. 현행 국사교과서가 성경과 같은 개신교 서적을 언급하지만 번역 문학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설명하고 있으며, 그것도 외국 문학에 대한 동경을 초래하는 폐단이 있다고 부정적인 언급을 하고 있다(320). 결국 한국 개신교가 한국 근대문명에 미친 영향은 시대가 바뀌면서 점점 더 축소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권 신장과 여성교육에 결정적으로 기여

한국 개신교는 구체적으로 나라에 근대문화를 도입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특히 모든 인간은 평등하며, 남녀는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상에서 여권 신장에 크게 기여했다. 특히 이화학당을 중심으로 한 한국의 여성 교육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하지만 현행 국사교과서에는 이런 분야에 관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여기에 비해 동학이 인내천 사상을 근거로 평등을 가르쳤고, 이것이 조선 사회에서 신분제도를 철폐하고, 평등에 크게 이바지했다고 설명하고 있다(233-234). 하지만 동학이 과연 근대 사상을 가진 운동인가 아니면 단지 유교적 이상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운동인가에 관해서는 논란이 많다.

흥미로운 것은 현행 국사교과서가 식생활 변화에 기독교가 끼친 영향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선교사가 들어오면서 한자리에 둘러앉아 밥을 나눠먹는 식사법이 생겨났다. 이전에는 남여가, 그리고 양반과 상민이 한 상에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 국사교과서는 이런 새로운 습관이 기독교 정신에서 나온 것이라는 것을 언급하지 않고 있다. 실제로 한국 개신교는 여성에게 이름을 줬으며, 남성의 여성 구타를 추방했고, 가정에서 남여평등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현행 국사교과서는 한인 이민사를 설명하면서 하와이 이민 사회가 학교와 교회를 세웠다고 언급해, 이민 사회가 개신교를 중심으로 움직였음을 암시하고 있다(2002).

하지만 전체적으로 국사교과서는 근대화에 미친 개신교의 역할을 축소하고 있다. 그러면 왜 이렇게 개신교가 미친 영향은 국사에서 점점 축소되고 있는가? 그것은 소위 내재적 발전론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국 근대화에 미친 외부 영향을 가능한 대로 축소시키고 모든 것이 우리 민족의 노력으로 했다는 배타적 민족주의 때문이다. 이같은 배타적 민족주의는 근대화 자체를 서구 제국주의의 영향으로 보고, 이것을 배제해야 진정한 우리 역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박명수 교수(서울신대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장, 교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