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초대원장).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교의 예배와 삶의 중심이었다. 성전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백성들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제사를 드리는 처소였다. 그런데 예수 당시 성전은 율법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이 속죄를 위하여 타성적으로 제사를 드리기 위해 제물을 사고 파는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됐다. 성전은 경건의 영과 헌신의 정신 없이 단지 형식적인 율법적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각종 번제물을 사고 파는 장사터로 변모하였다. 예수는 이 사실을 보고 진노하셨고 성전을 청결케 하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였던 예수의 성전 청결은 그의 메시아 의식에서 바르게 조명될 수 있다. 예수께서 성전 청결시에 하신 말씀 -이 성전을 허물면 사흘 만에 짓겠다- 은 나중에 예수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을 때 성전 모독의 죄목으로 고발된다.

구약의 성전: 가시적 성전

구약 출애굽 광야시절 하나님은 장막에서 그의 백성들을 만나셨다. 장막의 지성소는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고, 가장 거룩하였다. 성소에서는 속죄물을 바침으로써 백성들의 죄가 속함을 받았다. 지성소에는 대제사장이 1년에 한 번씩 들어가 희생의 제물을 바침으로써 자신과 백성들의 죄를 속죄하였다. 성막에는 하나님의 법궤와 만나와 아론의 지팡이가 진설(陳設)되었다. 성막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였다. 모세는 이 성막에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들을 만났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후에는 솔로몬 왕에 이르러 비로소 예루살렘 성전이 건립된다. 이 솔로몬 성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게 된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지 않음으로 이 성전은 바벨론에 의하여 훼파되고 하나님의 전(殿)의 집기들은 바벨론으로 옮겨가게 된다. 구약 역사서인 역대하서는 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여호야김이 왕위에 오를 때에 나이가 이십오세라. 예루살렘에서 십일년 동안 다스리며 그의 하나님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였더라.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올라와서 그를 치고 그를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잡아가고, 느부갓네살이 또 여호와의 전 기구들을 바벨론으로 가져다가 바벨론에 있는 자기 신당에 두었더라”(대하 36:5-7). 그리고 다니엘서 서문에 이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殿)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단 1:1-2). 그리하여 무너진 성전은 70년 후에 에스라와 학개와 스룹바벨이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보잘것 없는 모습으로 복구되고, 헤롯 시대에 와서 성전은 다시 확장 신축된다.

성전 청결

복음서 저자 요한은 복음서 앞부분에 예수의 성전 청결을 기록하고 있다. 다른 공관복음서에서는 복음서 끝부분에 기록되고 있는데, 요한복음에서는 성전 청결이 가나 혼인 잔치와 같이 복음서 서두에 놓여 있다. 성전 되신 예수의 메시아성을 강조하려는 저자의 편집 의도가 부각되어 있다. 유대인의 유월절 절기에 예수는 예루살렘에 올라 가신다. 성전은 내뜰과 외뜰이 있다. 외뜰은 내뜰로 들어가는 것이 금지된 이방인 방문자들에게 열려 있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경배하러온 이방인 경외자들은 외뜰에서 경배해야만 했다. 이방인 경외자들은 방문시 히브리 제사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약속을 받도록 도움을 받았다. 그래서 이사야는 예언하였다: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고 일컬어지게 될 것이다”(사56:7).

그런데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성전은 기도의 집에서 종교적 장사터로 변질돼 갔다. 짐승들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때 희생제물로 사용되었다. 짐승들은 제사드리는 자들에게 상품처럼 팔렸다. 그런데 이것이 관례가 되어 버림으로써 하나님의 전(殿)은 장사터로 변질된다. 외뜰이 파는 짐승으로 채워져서 이방인들이 하나님을 경배할 공간까지 빼앗았다. 예수는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 파는 사람들과 돈 바꾸는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신다”(요 2:14-15). 그리고 비둘기 파는 사람들에게 이르신다: “이것을 여기서 가져가라.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

이러한 예수의 성전 청결을 요한은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요 2:17). 요한과 제자들은 이 사건을 통하여 예수의 메시아적 사명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복음서 저자 마태는 이 성전을 청결한 예수의 행위가 나중에 예수를 십자가 죽음에 이르게 한 고발거리를 제공한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예수가 나중에 예루살렘에서 체포되어 공회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와서 성전 청결시(時) 예수가 한 말을 고발하고 있다: “이 사람의 말이 내가 하나님의 성전을 헐고 사흘 동안에 지을 수 있다 하더라”(마 26:61). 유대인들의 사고에 의하면 성전은 하나님의 집이기 때문에 성전을 허문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손상하는 것이며, 참람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수의 메시아 의식

유대인들은 예수의 성전 청결에 대하여 항의하면서 이에 대한 표적을 보이라고 요구한다: “네가 이런 일을 행하니 무슨 표적을 우리에게 보이겠느냐.”(요 2:18). 이에 대하여 예수는 대답한다: “너희가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요 2:19).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메시아 의식과 관련하여 이해될 수 있다. 당시 제사장 신분도 아니고 변두리 지역인 갈릴리에서 올라온 무명 랍비에 불과한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 청결을 시도한 것은 그의 메시아적 자의식에서 나온 것이다. 성전 청결은 선지자적 표적 행위 이상의 것이었다. 우리는 구약의 전통에서 이사야나 에스겔 등 예언자들에게서 타락한 제의(祭儀)에 대한 비판적 예언을 찾아 볼 수 있다. 그런데 랍비 예수가 몸소 채찍을 들고 성전을 청결하게 하였다는 것은 예언자적 비판을 넘어선 역사적 예수에게서만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행위이다. 이것은 메시아적 표적 행위였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이러한 예수의 메시아적 자의식을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구약 시편 69장 9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고 있다. 예수는 장사터로 변한 성전의 불결해진 모습을 보면서 성전 자체가 되시는 자신의 몸을 청결케 하여야 한다는 성전(聖殿)사모의 열정을 느꼈을 것이다. 예수의 인성이 그 안에 계시는 신성을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의 몸인 새로운 영적 성전을 지으시기 위하여 돌로 지어지고 의식(儀式)으로 집전되는 옛 성전을 헐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말씀에는 그의 메시아적 사역의 핵심 사상이 들어 있다.

성전에서 사고 파는 행위를 금지한 이유는 당시 성전 제사가 타락한 것을 지적할 뿐 아니라 성전 제사가 자신이 몸으로 드릴 종말론적 제사에 의하여 능가될 것을 예표하신 것이다. 또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만에 짓겠노라”는 예수의 말씀은 메시아로서의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촉발하게 하는 의도가 담겨 있는 말이었다. 예수는 자신의 죽음이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죄를 속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진정한 의미와 목적을 종말론적으로 성취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김세윤, “예수와 성전.” 『예수와 바울』, 참말, 1993, 119-165 ).

신약의 성전: 예수의 몸

유대인들은 예수의 이 말씀 -내가 삼일 만에 이 성전을 지으리라- 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예수를 힐난한다: “이 성전은 사십육 년 동안에 지었거늘 네가 삼 일 동안에 일으키겠느냐”(요 2:20). 예수의 이 말씀은 자신의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새 성전을 지으실 것을 공포하신 것이다.

헤롯 왕은 주전 20년/19년에 화려한 성전 확장공사를 시작하여 실질적으로는 성전을 새로이 건축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유대인들에게 예수의 말씀은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허튼 소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 요한은 “삼일 만에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예수의 말씀을 신령하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후에야 제자들이 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고 성경과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었더라”(요 2:21-22).

이 성전 청결은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과의 연관 속에서만 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 복음서 저자 요한은 성전이란 예수의 몸이라고 말하고 있다. 유대인들은 성전인 예수를 헐어 버리고자 했다. 말하자면, 성전이신 예수를 죽이고자 했다. 몸을 지니신 예수는 십자가 상에서 돌아가셨다. 그러나 그는 장사된지 사흘 만에 다시 사셨다. 대속적 죽음을 통해서 예수는 그의 몸으로 새로운 성전을 지으신 것이다. 몸을 지닌 예수는 부활하신 후, 성령의 임재 안에서 새로운 성전이 되신다. 이제 신령한 성전이신 예수(교회)는 우리가 하나님 만나는 처소가 된다.

성도의 몸인 성전

역사적 예수는 제자들에게 다른 보혜사인 진리의 영을 보내어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복음서 저자인 요한은 예수의 말씀을 잘 기록해 주고 있다: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요 14:16-17). 예수가 보내실 다른 보혜사란 희랍어 ‘파라클레토스’로서 “변호사/조력자/ 원조자”를 의미한다. 다른 보혜사는 위로자이다. 예수는 그가 부활하신 후에 위로자인 성령을 보내어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에 따라서 오순절 이후에 믿는 자의 마음 속에 위로자 성령을 보내어 주셔서 신자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고 계신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신 신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보이는 성전이 아니라 성령의 전에 관하여 말하고 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신자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은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고전 6:17)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 신자의 마음 속에 인격적으로 내주하기 때문이다.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20)

여기서 사도 바울은 보이지 않는 교회를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말하고 있다. 오늘날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가보면 솔로몬의 성전도 헤롯의 성전도 더 이상 남아있지 않다. 예수의 성전 청결 사건 이후 40년 만인 주후 70년,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성전은 로마군에 의하여 훼파된다. 그 후로 돌로 지어진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된다. 옛날 성전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은 이슬람이 세운 황금 성전 모스크이다. 보이지 않으신 하나님은 더 이상 가시적 성전 속에 계시지 않으시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기독교 복음의 전파를 통하여 복음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신자들의 마음 속에 영으로 내주하심으로써 성전을 이루고 계신다.

새 하늘과 새 땅의 성전

요한복음의 저자인 요한은 그의 계시록에서 다시 성전을 언급하고 있다. 여기서 요한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이루어지는 성전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요한은 종말론적으로 다가오는 새 하늘과 새 땅의 비전을 본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바다도 다시 있지 않더라.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계 21:1-2). 이 종말론적인 새 하늘과 새 땅에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지상으로 내려온다. 그리하여 보이지 않는 하나님은 인간 가운데 거하신다. 하나님이 거처를 인간의 거처 가운데 정하신다: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계 21:3).

종말론적 현실에서 새 예루살렘 안에 성전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요한은 증언한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성전이시기 때문이다. 해와 달도 필요없다, 하나님과 어린 양 그리스도가 새 하늘과 새 땅의 등불이 되시고 하나님의 영광이 온 누리에 편만하기 때문이다: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계 21:23).

종교의 완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

옛 예루살렘 성전이나 신약의 교회당은 하나님의 임재의 처소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 그의 성령을 보내어 주신 이래(以來) 하나님은 이제 그의 성도들의 마음 속에 내주하신다. 그러나 바울은 아직도 우리는 하나님을 희미하게 본다고 말했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세상의 종말에 이르러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며, 주님이 우리를 아신 것 처럼 우리도 주님을 알게 된다. 이 장면을 계시록의 저자 요한은 계시록 21장에 환상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성전이 없다: “성 안에서 내가 성전을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와 및 어린 양이 그 성전이심이라”(계 21:22).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종교는 완성되기 때문이다. 성전이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다. 그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만난다. 그 때 하나님의 장막이 인간들 가운데 계셔서 하나님이 친히 인간들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다. 그 때 우리는 하나님을 얼굴과 얼굴을 대면하여 보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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