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옥 박사(영문학, 영남신대 외래교수).
먼 산허리에 흰 눈이 남아있어도 바람에는 벌써 따스함이 묻어온다. 이제 곧 눈은 부드럽게 산허리에서 미끄러져 내려와 아직 얼음이 거치지 않은 시냇물에 몸을 담그고 흘러갈 것이다. 햇살이 많이 들지 않아도 잎들은 이미 녹색의 향내를 품고 있다. 목련은 햇살 따스한 쪽으로 긴 목을 내어놓고 기다리고 있다. 창문을 열어라. 꽃잎 여는 소리를 들어야 하지 않는가. 두터운 외투도 벗고 콧등을 간질이는 산들바람에게 맨살을 내어놓자. 바람은 당신의 속살에 닿으려 솜털 보송보송한 손을 펴고 서 있다. 바람과 살을 섞어라. 그리고 나서 반짝이는 잎들의 떨림을 노래하라. 하늘을 향해 뻗은 가지에서 나와 눈부신 햇살은 이고 흔들릴 때마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진다. 겨우내 추위에 눌려 숨을 죽인 채 소진되던 삶이 다시 피어나고 있다.

당신과 나는 근심과 삶의 노고에 골몰한 나머지 시간의 흐름도 잊고 있었나 보다. 언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힌 적이 있었는지. 전율하며 생명의 예감을 전하는 나뭇잎 하나엔 온 우주가 담겨있다. 우리의 얘기를 하자. 남의 삶에 대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에 대해 단순하면서도 진지한 얘기를. 우리는 때때로 격조 높은 언어로 불멸이나 신성의 존재를 말한다. 그러나 생명감으로 전율하는 풀잎은 묻고 있다. 자신이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그것이 운명을 결정하고 다가올 시간들의 방향을 지시한다. 한 개의 풀잎처럼 정직하자. 그는 보이지 않는 곳에 뿌리를 박은 나무에서 나와 하늘을 향하고 있다. 생명으로 충만하고 독립적이고 또 당당한 것은 이 때문이다.

따스한 한줌 햇살과 부드러운 한줌 바람을 노래하자. 당신의 작은 뜰에 심어놓은 목련이 솜털 보송보송한 가지를 딛고 꽃잎을 열려고 한다. 충분한 햇살을 받지 못해도 날마다 잊지 않고 찾아준 햇살 때문이며 부드러운 바람이 스쳐갈 때 닫혔던 모공이 열린 때문이다. 생명의 기운은 그들의 선물, 지금 당신의 작은 뜰은 소박하면서도 억누를 길 없는 만족감으로 가득하지 않는가. 머지않아 꽃잎은 사랑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추억이 되리라.

나는 이따금 성만찬에서 포도주를 마실 때 영혼의 전율을 느낀다. 신앙심이 깊어서가 아니다. 한 송이의 포도가 포도즙을 내고 포도주가 되고 그것이 다시 예수의 몸이 되는 그 변화의 과정에서 기적을 보는 때문이다. 성체는 다시 내 속에서 사랑이 되고 소망이 되고 영생이 되는 게 아닌가. 삶의 둥지에 따스한 한줌 햇살이 늘 비치게 하라. 부드러운 한줌 바람이 자연스럽게 찾아들게 하라. 이른 봄은 삶 그 자체 만큼이나 아름답다. 단 한줌의 바람과 햇살은 삶 그 자체와 가장 밀접한 예술이다.

당신의 정원의 새를 노래하라. 이른 아침 나무 숲에서 유난스런 새 소리를 들었다. 등줄기에서 꼬리까지는 흑갈색인데 노란 부리에 비단같이 부드럽고 검은 머리와 빨갛고 조그마한 발을 가진 15센티미터 정도의 새 두 마리이다. 큰 놈은 아래 나뭇가지에서, 작은 놈은 윗가지에서 서로 젠 걸음으로 빙빙 돌고 있다. 나는 호기심이 나서 나무 밑으로 살금 살금 기어가서 들키지 않게 자리를 잡았다. 드디어 큰 녀석이 부리를 흔들더니 돌진하듯 작은 녀석의 부리 속으로 밀어넣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이어 두 놈은 몸과 부리를 맞댄 채 양쪽으로 심하게 흔들더니 반쯤 눈을 감고 초조하게 발을 구른다. 나는 숨을 죽이고 쳐다보았다. 큰 녀석이 떨어져 나와 재친 걸음으로 작은 녀석 주위를 빙글빙글 돌면서 고개를 곧추세우고 다리에 힘을 준다. 이 때 작은 녀석이 몸통을 부풀려 머리를 끌어들이더니 눈을 감고 나무바닥에 납작 엎드린다. 그러자 큰놈이 날개를 푸덕거리더니 작은 녀석의 등을 타고 올라갔다.

모든 것을 망각한 황홀경에 빠져든 작은 새 두 마리, 갑자기 내 속에서 형언 할 수 없는 열망이 솟구쳐 오른다. 끝모를 열정 속으로 충만해 오는 당당함과 자유로움의 실체는 무엇일까. 생명이라는 선물에 대한 이 깊은 감탄은 어째서일까. 내 상상으로 정원은 하루 온종일 수액이 베어 나오는 에덴이 되었다. 인생은 생의 충동으로 이루어진다. 무한한 창조에의 의욕과 영원을 향한 도약도 생의 충동으로 가시화되는 게 아닐까.

삼월은 봄이 첫 발을 내어 디딤이다. 한 잎 떨리는 나뭇잎으로 찾아와 나뭇잎 하나 같은 당신의 생명을 일깨워 당신 자신의 삶을 말하게 하는 삼월, 한 줌 햇살과 한 줌의 바람으로 찾아와 생명을 흩어 펼쳐 보이는 삼월, 그 속에서 짝짓기 하는 새들을 노래하라. 노래할 때에 삼월은 꿈이 되고 사랑이 되고 추억이 된다. 부활이 되고 에덴이 된다. 에덴을 믿고 복락원에의 꿈을 꾸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러나 에덴을 노래할 줄 아는 사람은 더 행복하다. 삼월을 노래하라. 당신의 삶 그 자체와 가장 밀접한 예술품이다. 생의 충동으로 충만한 그 시간들을 노래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