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세례자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신 후에 예수는 복음전파 사역을 시작하기 위한 준비로서 유대광야로 나가신다. 그것도 자의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이끌리어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마4;1). 유대광야에서 예수는 40일간을 금식하시고 굶주림에 직면하시게 된다.


인간의 성정(性情)을 지니신 예수

광야 시험은 4 복음서 모두에 나온다. 광야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을 만나는 곳이었다. 이 시련을 통해서 이스라엘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났다. 모세가 하나님을 만나 곳도 광야였고,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십계명을 받은 곳도 시내산 광야였다. 광야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은 일상적인 삶으로부터 격리되고 연단받으면서 하나님과 만났다. 예수도 이러한 이스라엘의 전통에 따라서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교제 속에서 공적 사명을 위한 자기 연단을 위하여 광야로 나갔던 것이다. 4 복음서는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시는 예수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히 우리들에게 전해주고 있다.

우리는 예수가 메시아와 하나님의 아들이니까 광야의 시험같은 연단이 필요없을 줄을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예수를 기계적인 신인으로 생각하고 슈퍼맨(superman)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런 기계적인 수퍼맨으로서의 예수가 아니라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시고 고통을 받으시는 성정(性情)을 같이하시는 인간 예수에 관하여 알려주고 있다. 광야로 나간 예수는 신성(神性)을 가졌으나 어디까지나 우리와 똑 같은 인간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으로서 인간이 당해야 할 기본적인 유혹에 의하여 시험에 들 수 있었다.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를 하나의 아무런 고통이나 갈등없는 수퍼맨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와 같이 “성정을 가진 인간으로서 우리와 같이 시험을 당하였으나 죄는 없으시다”(히4;13)고 증언하고 있다.

세 가지 시험

광야에서 예수님은 물질의 시험, 명예의 시험, 부귀영화의 시험을 받으신다.

첫째, 악마는 40일간이나 금식하고 있는 예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라”(마4;3)고 시험한다. 악마는 배고파 굶주려 있는 예수에게 그의 메시아성에 호소하면서 예수를 시험한다. 악마의 유혹은 그럴듯 할 수 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기적을 보여라! 예수가 굶어 죽어버린다면 하나님의 구원사역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마귀는 그러니 “돌을 명하여 떡이 되게 하여 굶주림을 면하라”고 유혹한다. 악마의 말은 그럴듯했다. 그러나 예수는 이 유혹에 대하여 아니다!. 라고 거절한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4;4)고 대답한다. 영혼의 충족은 빵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은 떡으로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 지금은 하나님을 만나는 금식의 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굶주림을 채우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분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음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예수는 말씀하신다.

둘째, 마귀는 예수를 성전 꼭대기에 데리고 올라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그러면 천사가 너를 받아 줄 것이다.”(마4;6) “그러면 사람들이 너가 메시아인줄 알고 너에게 환호성을 지르면서 너를 따라 올 것이다.” 마귀는 예수더러 종교적인 이적(異蹟)을 행사함으로써 그가 메시아라는 것을 보여주고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라는 것이다. 이 시험은 영광의 메시아의 길을 가라는 것이다. 이적을 행함으로 사람들에게 메시아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 잡으라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너희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고 대답하시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나리라는 악마의 유혹을 거절한다. 진정한 종교는 이적을 통하여 증명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적 희생을 통하여 제시된다. 사람들의 인정과 추종과 지지를 바라는 것은 인본주의적 종교요 진정한 신본적 종교는 아니다. 예수는 이러한 정신으로 십자가 상에서도 로마병정들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스스로 구원하라, 십자가 상에서 내려오라’는 유혹을 물리쳤다. 그는 십자가 상에서 힘없는 죄인처럼 죽어갔다. 사람들은 예수가 신뢰하는 하나님으로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실상은 하나님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와 함께 계셨던 것이다. 예수의 부활 사건이 이를 보여준다.

셋째, 마귀는 예수를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가서 천하만국의 영광을 보여주며 “만일 네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마4;9)라고 유혹한다. 이것은 예수가 마귀에게 굴복하면 세상의 모든 쾌락과 영광을 주겠다는 것이다. 마귀는 예수에게 이 세상의 영광과 메시아적 사명을 교환하자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사단아 물러가라”고 명하시고, 이어서 “주 너희 하나님을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고 대답하신다. 인간은 하나님과 세상의 부귀영화를 동시에 섬길 수 없다. 이 세상의 부귀영화와 권세는 물신(物神)이다. 이것은 악마가 잠간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세속적인 신이다. 예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이기신다. 그리하여 “마귀는 떠나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든다”(마4;11).

세 가지 시험의 의미

첫째, 시험은 반드시 죄가 아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공중의 새가 머리 위를 나는 것은 나와는 상관 없는 일이다. 단지 그 새가 나의 머리에 둥지를 틀도록 허락해서는 않된다고 말하고 있다. 죄의 시험이란 육신을 가진 인간에게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법이다. 단지 우리가 자유의지를 가지고 그것에 허용을 하지 않을 때 죄는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예수는 세번 사단으로부터 유혹을 당하였으나 이를 거절하여 죄를 범하지 않았다.

둘째, 예수는 인간이 받는 기본적인 시험인 물질, 명예, 부귀영화의 시험을 받으시고 그것을 이기셨다. 독일의 순교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는 광야의 세 가지 시험은 인간이 받는 기본적인 시험을 예수께서 받으셨고 이것을 이기셨다고 해석한다. 인간이신 예수는 아담이 실패한 기본시험에 승리하시고 우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길을 여셨다.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신 예수: 성육신의 실재성 증시

시험이란 육신을 쓴 인간에게 다가온다. 물질의 시험, 명예의 시험, 부귀영화의 시험은 육체(肉體)를 가진 인간에게 다가온다. 예수가 광야에 나가서 40일간 주리고 인간이 당하는 세 가지 시험을 당했다는 것은 그의 성육신이 영지주의자들이 말하는 것 처럼 가현(假現)이 아니라 실재로 육신을 쓰시고 인간이 되셨다는 사실을 입증해준다. 예수께서는 “친히 시험을 받고 고난을 당했기 때문에”(히2;8) 그는 우리를 도우실 수 있다. 예수는 그 자신이 고통과 시련과 유혹을 당해보았기 때문에 우리 인간이 당하는 모든 시련과 유혹과 환난 가운데서 우리의 사정을 아신다. 그래서 그는 우리의 중보자가 되실 수 있고 되고 계신다.

40일간의 시험 받으심은 나사렛 예수 안에서 우리 인간의 죄와 고통 가운데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와 떨어져 초연히 계시고 죄인인 우리를 벌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나사렛 예수 안에서 우리 인간의 고난과 고통의 현장 가운데 우리와 같이 계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허물과 고통을 면제(免除)해 주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고통의 골짜기를 인내와 믿음으로 지나가도록 돌보시는 공감의 하나님이시다. 나사렛 예수는 광야에서의 40일간 시험을 통하여 이러한 시험 가운데 우리와 같이 하시는 하나님을 보여주고 계신다. 예수 자신이 인간이 받는 시험을 받으시므로 그는 가현(假現)적인 인간이 아니라 실재로 육신을 쓰고 오신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고 계신다. 이러한 40일간의 예수의 시험은 초대교회 내 영지주의자들이 주장한 그리스도가 영으로만 우리 가운데 왔다는 주장이 거짓임을 구체적으로 증명해 주고 있다. 나사렛 예수는 육신을 쓰고 오신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인간이 당하는 시험과 유혹에 자신을 맡기신다. 그리고 시험을 이기신다. 여기에 우리는 나사렛 예수 안에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시다. 나사렛 예수 자신이 바로 복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