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교수(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1947년에 사해(死海) 해변 11개 동굴에서 문서들이 우연히 발견되었다. 어느 베두인 목동이 양을 찾기 위해 이 해변 동굴에 들어갔다가 돌항아리 안에 있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뭉치를 발견한 것이다. 이 두루마리가 쿰란 문서인데 이 명칭은 이 지역에 살았던 쿰란 공동체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쿰란 공동체는 나사렛 예수의 생존 당시에 살았던 유대인 신앙 공동체이다. 이들이 남긴 문서와 유물들은 예수 생존 당시 유대인들의 종교사상과 생활 방식, 풍습과 조직 등에 대해 많은 정보와 지식을 제공해 주고 있다. 그러므로 쿰란 문서는 역사적 예수의 사역과 그의 메시지를 이해하는 데 보다 풍요한 역사적 자료를 제공해주고 있다.


쿰란 공동체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은 다가오는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맞이하기 위하여 광야로 나갔다. 이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거주지에서 떠나 외딴 광야로 이주하였다. 광야에서 이들은 참회하고 하나님을 만나고자 하였다. 그것은 구약 이스라엘 조상들이 광야로 나와서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받은 것을 본받은 것이다.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은 사해부근의 광야에서 공동체를 세웠다. 이들은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시내산이라는 광야로 데리고 가서 율법을 주신 것을 따랐던 것이다.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기다렸다. 출애굽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땅이 비옥했으나 야훼 하나님을 믿지 않고 태양신을 숭배한 이집트의 바로 왕으로부터 도피한 것처럼 이들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은 불경한 사람들이 많이 사는 거주지에서 벗어나 광야로 도피하였다. 이들에게 문화란 불순하고 악한 세력에 의하여 지배받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들은 “광야에서 야훼의 길을 예비하라”(사 40:3)는 이사야의 신비스런 말씀을 그들의 삶의 지침으로 삼았다.

쿰란 공동체는 에세네파 내의 한 분파이고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하는 강경파였다. 쿰란 공동체는 세상의 종말을 기대하는 공동체였다. 이들 구성원들은 구약 예언자들이 전한 메시지, 즉 하나님께서 심판하러 오시는 것과 구원의 날이 임박했다는 메시지를 믿고 다가올 의의 교사(teacher of the righteousness)에 대한 대망 속에서 생활했다. 이 메시지는 구약성서의 에스겔서와 다니엘서에서 끌어낸 것이다. 이들은 광야에서 다가오는 하나님의 임재를 기대하였다. 이들은 회개함으로써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보증을 얻으려고 하였다. 이들은 마음과 몸이 천사같이 순결한 사람만이 하나님의 현현에 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성별된 공동체 안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는 데서 가능하다고 보았다. 이들은 성결한 생활을 위하여 공동생활(vita communitis)의 규칙을 필요로 하였다. 에세네 공동체 안에서도 엄격한 분파였던 쿰란 공동체는 착하고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을 위하여 그 적대세력인 로마는 멸망해야 한다는 과격한 종말론을 가졌다.

이들은 공동체 규칙을 구약성서에서 이끌어 내었다. 이전에는 하나님의 현전(現前)에서 섬기던 제사장들이 지키던 규칙이 이제는 일반 평신도들에게 확장되었다. 그 규칙은 몸의 정결욕, 결혼의 포기, 소유의 공동화, 공동노동, 공동식사를 하는 것이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마치 이스라엘이 시내산에서 강림하시는 하나님을 맞이하는 경건한 태도로 하나님의 도래를 고대하였다.(O. Betz, Was wissen wir von Jesus? 27)

시내산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실 때 하나님은 백성들에게 옷을 빨고, 사흘 동안 성행위를 금하고 하나님의 오심을 몸소 준비하도록 명하셨다(출 19:10-11, 14-15). 그러나 하나님이 오시는 정확한 시간은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에게는 감추어져 있었다. 이 세상의 각 순간이 마지막 순간이 될 수 있었다. 그래서 지속적인 준비태세 속에 있도록 했다. 이들은 종말론적 삶을 살았다. 쿰란 공동체 사람들은 이 세상과는 절연된 상태에서 광야에서 종말론적 기대 속에서 거룩한 예배를 드렸다. 이들은 수도원식의 금욕생활을 영위하였다.

쿰란 공동체 소속인들은 하나님께서 시내산에 내려오셔서 이스라엘과 언약을 맺으신다는 말씀을 이제 종말의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지시로 이해하였다. 예전처럼 하나님은 번개와 천둥을 동반하시며 강림하실 것이고, 영광의 불로써 모든 불순물과 부정한 자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경건한 택한 자들과는 언약을 갱신하시고 신자의 영원한 사귐에서 이들을 천사들의 반열에 세우실 것이다. 이 때에 이스라엘은 비로소 쿰란 공동체를 통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목표에 도달하고, 시내산에서 제정하신 그 언약 백성의 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거룩한 백성이 되고 제사장의 나라가 될 것이다(출 19:6).

이들은 인간의 경건노력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구원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마지막 때 악마는 자기의 군대를 총집합하여 모든 종류의 영적 공격을 감행하면서 성도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강림하실 때 하나님은 택한 자들을 정결케 하는 물로 씻듯이 성령으로 깨끗케 하시고 모든 오류의 영들로부터 택한 자들을 해방시키실 것이다.

예루살렘의 시므온과 아리마데 요셉

얼마나 많은 에세네파 소속인들이 쿰란 공동체의 규칙을 따랐는지는 알 수는 없다. 1세기 중반까지 약 4천명의 에세네파 소속인들이 있었다고 한다(F. F. Bruce, The Real Jesus, London: Hodder & Stroughton, 1985, 143). 이 숫자는 쿰란공동체 소속인들에다 이스라엘 도시와 마을에 있는 동조자와 지원자들을 포함하는 것이다. 에세네파들은 여행 중 항상 동료 에세네파 소속인들의 환대를 발견했을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있는 에세네파 소속인들은 전국적으로 여기저기 일상적 삶을 영위하면서 에세네파의 준회원(associate member of the Essene order)으로 불렸을 것이다.

특히 그의 복음서에서 누가는 아기 예수 메시야의 오심과 관련하여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며, 성령이 그 위에 계시는 자”들(눅 2:25-38)을 언급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과 아셀 지파 마누엘의 딸 안나 선지자, 그리고 아리마대 요셉(눅 23:50-53)이다. 이들은 에세네파라고는 할 수는 없으나 에세네파가 가진 기대의 어떤 것을 공유한 자라고 말할 수 있다. 예수께서 12제자들을 복음 전파하러 보내실 때에도 하나님 나라를 기대하는 자를 찾아가라고 명령하신다: “아무 성이나 촌에 들어가든지 그 중에 합당한 자를 찾아내어 너희 떠나기까지 거기서 머물라”(마 10:11). 여기서 마태가 언급하는 “합당한 자”들이란 아마도 에세네파의 이상에 동조하는 자들이었을 것이다.

정결규례에 대한 논쟁: 예수는 에세네파가 아니었다

마가는 그의 복음서에서 바리새파와 에세네파들이 엄격히 지킨 정결규례에 대하여 역사적 예수와의 논쟁을 기록하고 있다. 바리새파는 음식을 먹기 전에 손을 씻었다. “바리새인들과 모든 유대인들이 장로들의 유전을 지키어 부지런히 씻지 아니하면 먹지 아니하며, 또 시장에서 돌아 와서는 물을 뿌리지 않으면 먹지 아니하며 그 외에도 여러 가지를 지키어 오는 것이 있으니, 잔과 주발과 놋 그릇을 씻음이러라”(막 7:3-4). 바리새인들만이 아니라 특히 에세네파들은 정결규례를 더욱 철저히 지켰다. 이들은 정결규례를 지킴으로써 자신을 정결하게 보존함으로써 다가오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예수와 제자들은 이러한 정결규례를 준행하지 않고 식사를 하였다. 그래서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어찌하여 당신의 제자들은 장로들의 유전을 준행치 아니하고 부정한 손으로 떡을 먹나이까”(막 7:5)라고 비난하였다. 이에 대하여 예수는 이들의 외식(外飾)에 대하여 언급하시면서 이들이 하나님의 내적 정결의 계명을 인간의 외적 계명으로 바꾸었다고 질책하신다: “이사야가 너희 외식하는 자에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막 7:6). 예수는 이러한 정결규례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람의 규례가 되어 버림을 지적하신다. 정결규례의 진정한 의미는 내면적 정결이지 외면적 꾸밈이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는 바리새파나 에세네파들은 하나님의 내면적 정결의 규례를 외면적 규례로 바꾸었음을 지적하신다: “너희가 하나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유전을 지키느니라”(막 7:8).

예수는 세례를 베풀지 아니하였다. 그에게는 금욕적인 생활도 없었다. 세례자 요한에 비교하여 예수는 “먹기를 탐하고 술을 즐기는 자”라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금욕적인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와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와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세속적이라고 비난을 가한 것이다. 마태는 이 사실에 대하여 다음같이 알려준다;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저희가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8-19)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금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희락과 평화 속에서 이루어지며, 하나님 나라는 외식하는 자들의 처소가 아니라 회개하는 세리와 죄인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지혜이다. 하나님의 지혜란 인간의 의를 내세우는 영광스러운 길이 아니라 회개하고 용서받는 십자가의 길이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예수의 말씀을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마 9:13).

쿰란 공동체가 일부다처제를 금한 데 반해서 예수는 이혼과 재혼을 금하였다. 예수는 안식일 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창조 이야기에 호소했으나 예수의 안식일법 해석은 쿰란공동체 내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쿰란공동체가 안식일에는 구덩이에 빠진 가축의 구출을 엄격히 금지하였는데 반해서 예수님은 허용하였다. 예수님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으며, 안식일에 선한 일을 하고 구덩이에 빠진 가축을 구출해내는 것이 안식일의 정신에 합당하다(눅6:6-10, 막3:1-4)고 말씀하신다.

복음서 기자 마태는 다음같이 기록하고 있다: “거기에서 떠나 그들의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는지라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물어 이르되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이 옳으니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끌어내지 않겠느냐. 사람이 양보다 얼마나 더 귀하냐 그러므로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이 옳으니라 하시고 이에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손을 내밀라 하시니 그가 내밀매 다른 손과 같이 회복되어 성하더라”(마 12:9-13).

에세네파는 번잡한 도시와는 격리된 곳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세속과의 격리 속에서 신앙생활을 영위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사람들이 많은 도시, 갈릴리 호수의 서쪽의 번화한 도시에서 사역을 하셨다. 예수님이 들어가 가르치시고 치유사역을 하신 회당은 도시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예수는 도심 속에서 사역하시면서 새벽 미명에 일어나 한적한 곳에 나아가 기도하셨다. 예수는 에세네파들이 기다리던 의의 교사를 넘어서서 하나님 나라를 실현하실 새 시대의 메시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