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의 <아기 예수께 경배하는 목자들(1646)>.

이 그림은 그리스도를 경배하는 목자들의 벅찬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담고 있다.


아기 예수가 구유에 누워 있고 그 곁을 마리아와 요셉이 지키고 있으며, 그 앞에 목자 한 사람이 나와 무릎을 꿇고 손을 모아 기도한다. 아기 예수의 발꿈치에서 지팡이를 들고 감격에 젖은 목자, 그리고 호롱불을 왼손에 들고 오른손을 들어 기도하는 목자 등이 눈에 띈다. 또 화면 오른편 귀퉁이에서 강아지를 돌보는 어린 아이, 얼굴을 마주보며 이야기를 나누는 여인들도 그림의 분위기를 한층 생동감 있게 만든다. 화면 뒤편의 여물을 먹는 말, 널빤지를 이어붙인 벽면과 사다리, 지붕 등은 이곳이 허름한 마굿간임을 알려준다.

한 줄기 빛이 아기 예수에게 비춘다. 돌연 주위가 환해지며 사람들의 표정까지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어둠 속에 묻혀있던 목자들의 표정이 살아난다. 그들의 얼굴에는 ‘세상의 빛’으로 오신 아기 예수를 맞이하는 목자들의 기쁨과 감격이 깃들어 있다. 조촐하지만 진실되고, 꾸밈없지만 진정한 예배가 드려지고 있는 중이다. 아무런 감동도 없는 겉치레의 예배가 아니라 심령으로 드리는 예배의 순간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렘브란트가 목자들의 목소리까지 담아내진 못했지만 아마 그 목소리는 떨렸을 것이다. 그들의 입술을 보라. 감사와 기쁨의 소용돌이에 휩싸여 씰룩거리는 것 같지 않은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자. “그토록 기다리던 메시야가 오셨다”고 토로하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심장은 어느 때보다 두근거렸을 것이고 혈관마저 기쁨을 이기지 못하고 마구 고동쳤을 것이다.

목자들은 ‘기쁜 소식’을 듣자마자 먼 길을 지체없이 달려왔다. 목자들은 천사에게 ‘들은 것’으로 인해, 또 구유에 있는 아기를 ‘본 사실’로 인해, 그리고 자기들이 듣던 바대로 아기가 강보에 싸여 있음을 ‘안 것’으로 인해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인생 최대의 사건, 그러니까 그리스도를 만난 것으로 인하여 감사를 드린다.

렘브란트가 그리려고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사실의 기록만이 아니다. ‘성화(聖畵)’라는 장르를 남기기 위한 것도 아니다. 그가 의도한 것은 그리스도께 드려지는 ‘진정한 예배’가 아닐까. 그리스도께 우리가 취해야 할 바가 ‘경배’요 ‘찬양’임을 일러주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마굿간에 모인 사람들은 한결같이 경배의 자세를 취한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에는 아기 예수에 대한 고마움과 사랑, 호기심과 두려움이 실려 있다. 그들의 모습에는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맞는 마음이 실려 있고, 하늘과 땅의 주재께 조용히 고개 숙이는 겸손이 아로새겨져 있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