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자녀들은 간혹 가다가 자신의 의견을 관철하기 위하여 아버지의 권위와 맞서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이 심하면 가출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아버지들은 절대로 먼저 손을 내밀지 않고 어머니가 중재를 하여 화해를 하게 합니다.


북한은 출신성분을 많이 따지는데 이것 때문에 개인의 자아실현에 큰 장애를 가집니다. 저는 아버지가 3대 머슴을 사셨고 어머님이 12살 때부터 일본 사람의 아이를 보았습니다. 출신성분이 나쁜 사람들의 자식들은 동네에서조차 의심을 받고 군대 가기도 어렵고 당원이 되기는 더욱 어렵습니다. 물론 대학은 꿈도 꾸지 못하지요. 그러니 간부는 어림도 없고 직장도 가장 힘든 탄광이나 광산, 제철소, 제련소, 유해부분의 용광로 같은 곳으로 가야 됩니다.

때문에 청춘남녀가 시집, 장가를 갈 때에는 출신성분을 우선으로 참작합니다. 먼저 보는 것이 출신성분이고 둘째로 당원이냐 아니냐를 따지고 그 다음 첫째냐 셋째냐를 따집니다. 북한에서는 셋째 딸은 선을 보지 않고도 데려간다고 합니다. 셋째 아들도 선을 보지 않고도 사위로 맞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셋째기 때문에 부모를 모실 가능성이 거의 희박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 보는 것이 부모의 직위, 돈의 유무, 앞으로 출세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따지고 맨 나중에 사람 됨됨이를 봅니다.

최근에는 북한의 경제 사정이 어려워지고 배급이 끊기면서 많은 사람들이 장사를 하면서 살기 때문에 노동 당원이든 아니든 출신 성분은 제쳐두고 돈을 많이 버는 사람이 제일이라는 관념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북한은 아직도 가부장적 전통이 강하기 때문에 남자들(특히 아버지)은 가사 일을 거의 하지 않습니다. 저도 역시 10년 간 가정 생활을 하면서 어쩌다 한 번 밥을 해 준 적 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남자는 나가서 큰일을 하면 되지 집안에서 가사 일을 돕는 것은 제구실을 못하는 것이 되고, 여편네 앞에서 굽실댄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가정의 모든 일은 전적으로 여자가 하게 됩니다. 딸을 둔 어머니는 그래도 좀 쉬운 편입니다. 어머니가 일을 나가고 없으면 빨래도 하고 청소도 하고 밥도 지으며 도와줍니다. 아들은 대부분 땔나무를 해오고 나무를 패고 석탄을 나르는 일을 합니다.

생일이 오면 부모님들은 자식들의 생일을 잘 차려주려고 노력을 하나 최근에는 생일을 거의 잊고 사는 청년들이 많습니다. 자식들은 어머니의 생일은 별로 중시하지 않으나 아버지의 생일을 중시하기에 그날에는 술 한 병을 구하여 부모에게 부어 드리는 것이 하나의 전통이 되었습니다.

일반 주민들이 사는 집은 대부분 한 칸이나 두 칸 집인데 한국의 평수를 대비하면 7~8평 정도입니다. 화장실이나 수도는 공동으로 사용하는 것이 기본인데 간부들은 약 25평 정도의 세 칸짜리 집에서 삽니다. 때문에 북한의 학생들이 자기 방을 갖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합니다. 자식들은 남녀 구별이 없이 할머니나 할아버지와 같이 방을 씁니다. 그러므로 극히 드물기는 하지만 오누이가 서로 사랑을 나누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고급간부들의 집은 특별하기에 별도로 소개하렵니다. 1억 달러 안팎으로 하는 집을 김정일은 32개나 가지고 있으니 같이 소개하기에는 무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북한의 청소년들이 외식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 합니다. 왜냐면 부모와 같이 외식을 할 수 있는 시설도 부족하고 경제적 여유도 없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아르바이트라는 말조차 모릅니다. 그리고 외출하는 경우가 거의 없는데 이는 경제 사정도 사정이지만 가족 단위로 놀러 가기보다는 직장에서 남자들 중심으로 놀러 다니는 것이 기본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여성들이 조금씩 끼여 같이 놀러 다니는 경우가 있는데 이 때 여성들은 거의 식모 맞잡이로 남자들에게 먹을 것을 차려주고 깨끗이 치워주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북한의 여성들이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면 사람 축에도 못 끼는 망나니로 취급되기 때문에 담배 피우는 아가씨는 하나도 없습니다. 어쩌다 술을 마시는 경우가 있는데 사람들의 따가운 눈을 피할 수 없고 시집갈 때에도 많은 지장을 받게 됩니다.

북한에는 매년 6월1일에 국제아동절 기념행사를 하는데 이 때에는 각 도, 시, 군의 어린이들이 예술소조 종합공연과 체육, 오락경기인 자전거 경기, 밧줄 당기기, 놀이 감 따기, 통일기차 놀이, 글자 붙이기, 활쏘기 체조, 보물찾기 등의 경기를 합니다. 북한의 어린이들이 제일 좋아하는 명절은 김일성, 김정일의 명절인데 그것은 그날에 사탕 봉지나 교복을 선물로 주기 때문입니다. 10살이 지난 다음에는 사탕도 주지 않으나 그 대신 마음껏 놀 수 있는 휴식일입니다. 그 다음 좋아하는 명절이 설날이나 10월10일 당 창건기념일, 9월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창건기념일입니다. 설날에는 세배를 드리려 선생님들의 집을 찾아가 세배를 드립니다. 그 때 세배 값으로 용돈을 받습니다.

북한 어린이들의 평균키가 한국 어린이들의 평균키와 약 11㎝가 차이 난다고 하는데 북한 어린이들은 제대로 먹지를 못하여 누렇게 얼굴이 뜨고 키가 제대로 자라지 못해 17~18세 되는 아이들이 보통 11~12살 같아 보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북한에서 군대에 가는 나이가 평균17~18세이다 보니 북한 어른들은 그들이 군대에 나가면 정찰병을 하면 딱 맞는다고 합니다. 왜냐면 누구도 감히 10살 안팎의 나이 밖에 안 되 보이는 어린이가 정찰병을 하리라고 생각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17~20세 안팎의 북한 군인이 한국으로 와서 간첩행위를 한다면 그는 사랑의 대상이지 경계의 대상이 되지 못하기 때문에 얼마든지 마음 놓고 간첩행위를 할 수 있습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 학생들이 도시락을 싸지 못하여 점심을 대개 굶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저도 역시 노동자의 자식으로 태여 난 죄 아닌 죄로 인해 제대로 먹지 못하고 일에만 시달리다 보니 군대에 갈 때 키가 1m47㎝였고 무계는 45킬로그램이였습니다. 제가 군에 나가니 먼저 입대한 구대원(상급)들은 저를 만화(인형)라고 하면서 어깨에 메고 다녔습니다.

저는 도시락을 거의 싸지 못하였고 어려서부터 부모님을 도와 가마니를 짜고 토끼, 돼지, 개, 양, 염소를 길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지금도 시간이 있으면 글을 읽거나 신문을 읽는 것 보다는 고기를 잡거나 산에 올라가 산나물을 캐거나 버섯을 따고 약초를 캐는 것이 훨씬 더 가까운 취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집 뒤에 가면 갖가지 버섯이 많습니다. 제가 버섯을 뜯어 먹으면 한국 사람들은 버섯 잘못 먹으면 죽는다고 충고를 합니다.

그러나 저는 수십 가지의 버섯을 이름은 모르나 처음 보는 버섯이라도 육감적으로 이것은 먹는 버섯이고 저것은 못 먹는 버섯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주저 없이 따다 먹습니다. 내가 갖가지 버섯을 뜯어 먹고도 죽지 않는 것을 본 한국 사람들이 저에게 어떻게 먹는가를 물어와 알려주면 그 다음부터는 약이라면 개똥도 먹는다는 말처럼 ‘이 좋은 자연산 버섯을 왜 몰랐을까’라면서 제가 따기 전에 먼저 다 따먹습니다. 맛을 들인 사람들이 먼저 다 따가기에 저는 자전거를 타고 멀리 가서 버섯을 따는데 그 때부터 사람들이 보는 데서는 될수록 따지 않고 보지 않을 때 따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9살 난 큰 아들애가 눈치를 채고 아빠가 하는 대로 따라합니다. 지금은 전도사가 아들에게 좋지 않은 것을 가르쳐주는구나 싶어 그러면 안 된다고 책망합니다.

아직도 저의 기억에 남는 것은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저의 어머님이 평양에서 김책공업종합대학에 다니는 외삼촌의 결혼식에 쓰시려고 구한 닭 알 15알을 몰래 먹은 것입니다. 제가 먹을까봐 어머님이 그물에 넣어 천정에 달아매 놓은 것을 매일 구경만 하자니 더는 참을 수 없어 몰래 걸상을 놓고 올라가 매일 하나씩, 두개씩 꺼내 먹었습니다. 바늘로 닭 알의 양쪽 끝을 찌르고 내용물을 빨아먹고 빈 껍질만 다시 넣어 두었는데 어느새 15알을 다 먹어버리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에게 들킬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냈지만 그런대로 들키지 않은 것은 겉으로는 그대로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나는 점심에 먹을 빵 밑굽을 뚫고 들어가 다 파먹고는 껍데기만 남겨놓고 그대로 그릇에 담아 놓았습니다. 그러면 어머님은 점심 때까지 전혀 눈치를 채지 못합니다. 꿀을 병에 담아 놓으면 그것을 먹고 싶어 참을 수 없기에 조금씩 혀에 찍어 먹고는 양이 모자라면 수채화(그림 그릴 때 물에 풀어쓰는 물감)의 색감을 꿀 색깔과 같이 맞추어 꿀 병에 넣어 놓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순간이지 얼마가지 못해 들키고는 아픈 매를 얻어맞습니다. 삼촌의 결혼식에 쓰려는 닭 알을 다 훔쳐 먹고 껍데기만 남겨 놓았는데 그것을 모르는 어머님이 결혼식 날에 닭 알을 삶으려고 보니 빈 껍데기 밖에 없는 것을 알고는 너무나 억이 막혔는지 웃기만 하셨습니다. 당장에 닭 알을 구할 수 없어 그냥 빈껍데기를 사라(접시)에 담아 잔치 상에 올려놓고 사진을 찍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저는 먹는 것과 전투를 하면서 어린 시절의 배고픔을 달랬습니다. 부모 몰래 훔쳐 먹고는 얻어맞고, 피를 흘리기를 그 몇 번일까? 때리고는 가슴 아파 우는 부모님, 얼려도 보고 때려도 보고, 욕하기도 해 보지만 배고픔에 시달리는 어린 아들의 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노동자의 신분인 부모님에게는 너무나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배고픔에 지친 아들이 훔쳐 먹는 것은 도덕을 떠난 생의 본능이 아니었나 생각해 봅니다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굶어 돌아가신 어머님 앞에 너무 큰 불효였습니다.

탈북자 이영희(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