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시간이 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과격 종교개혁운동들로 나타났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신앙이나 신학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사이비 또는 이단으로 변질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칼슈타트와 뮌쳐의 과격 개혁운동에 이어 여기서는 재세례파의 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본다.


“재 세례파(Anabaptists)”

칼슈타트가 빗텐베르그에서 루터의 개혁운동에 반대하며 과격 개혁운동을 일으켰던 것처럼 취리히에서도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에 대해 불만을 품고 과격 개혁운동을 일으킨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서 가장 과격한 자는 취리히의 그레벨(Conard Grebel)과 만츠(Felix Manz)였다. 이들은 1523년 10월 제2차 대변론에서 성상과 미사를 즉각 폐지하라고 요구하면서 쯔빙글리의 보수적인 태도와 분리했다. 이들은 즉시 사도적 모형에 따라 완전히 재구성된 “참 교회”를 세우려고 했다. 그리고 참 교회를 구성하는 요소는 중생의 체험을 가진 자들이 성인 세례, 즉 재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들은 유아 세례를 부인했으며 유일하고 타당한 세례는 내적 중생의 체험을 가진 사람에게 시행하는 성인 세례라고 주장하면서 이와 같은 경험(즉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사는)은 어린 아이에게는 불가능하므로 유아 세례를 받은 자는 다시 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취리히시는 1525년 1월 17일 세례 문제에 대해 공개토론을 벌였는데 쯔빙글리의 입장을 변호하며 유아 세례가 성경적이라고 선언했다. 취리히시는 그 다음날 모든 세례 받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유아 세례를 시행하도록 명했고 3일 후에는 과격파들의 집회를 금지했다.

바로 그날, 즉 1월 21일 저녁 과격파들은 함께 모여 자기들의 입장을 재확인하며 시의 명령에 불복하고 성인 세례를 베풀기로 결정했다. 재세례파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는데 그들은 서로를 격려하며 의인이 세상에서 박해를 받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재세례파들의 운동이 커지자 1529년 독일 의회가 슈파이어(Speyer)에서 개최되어 재세례파들을 사형에 처하기로 결정했다. 재 세례파들은 가는 곳마다 박해와 죽음을 당했으나 모라비아 지방의 통치자들만은 재 세례파들에게 관용을 베풀었다. 결국 박해를 받던 재세례파들이 모라비아에 모여들었고 야곱 후터(Jacob Hutter)의 지도 아래 공동생활을 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후터의 지도를 받는 모라비아의 재세례파들을 가리켜 후터파(Hutterites)라고 불렀다.

재 세례파들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문자적 성경 해석을 주장하며 산상보훈의 교훈을 문자대로 받아들여 실천하려고 했고 그들 중 일부는 구약의 일부다처제도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실천했다. 2) 직접 계시를 주장하며 영에 사로잡힌 예언자들의 말을 구약 예언자들의 말처럼 권위 있게 여겼다. 3) 역사와 문화에 대해 부정적인 태도를 취했다. 4) 분파적 교회관을 내세우며 교회는 필연적으로 소수의 무리로 구성되고 박해를 받으며 국가와는 연합될 수 없는 단체로 간주했다. 5) 성경 연구를 강조했다. 6) 부정적 국가관을 내세우며 무기 사용과 맹세를 배격했다. 7) 극심한 선교열을 고취했다.

재세례파들은 계속해서 박해와 추방과 죽음을 당했다. 1527년에는 만츠가 익살 당했고 자틀러는 분살 당했다. 1533년에는 호프만(Melchior Hoffmann)이 자칭 선지자라고 주장하면서 스트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