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시간이 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운동들로 나타났다. 루터의 개혁운동이 중세 교회를 충분히 개혁하지 못하다고 규정하며 보다 철저한 개혁의 필요를 부르짖는 급진적인 과격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사람은 누구나 제한되어 있고 따라서 인간의 신앙운동도 신학운동도 교파운동도 모두 제한되어 있다. 그래서 신앙이나 신학 운동이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서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때로는 극단적인 사이비 또는 이단으로 변질하기도 한다.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른다. 전번에는 칼슈타트의 과격(급진적) 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여기서는 뮌쳐의 과격(급진적) 개혁운동에 대해서 살펴본다.


“뮌쳐의 과격(급진적) 개혁운동”

칼슈타트가 삭소니에서 추방되었지만 과격 종교개혁운동은 토마스 뮌쳐(Thomas Muntzer)에 의해 더욱 과격한 형태로 계속되었다. 뮌쳐는 1488년경 독일 스톨베르그에서 출생했는데 후에 라이프찌히대학과 프랑크푸르트에서 수학했다. 그는 총명했지만 지나치게 성급하여 학문을 지속하지도 못했고 한 곳에 정착하지도 못했다.

뮌쳐는 1519년경 라이프찌히에서 아마 루터를 만났을 것이고 요아킴과 후스의 영향을 받아 급진적인 개혁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는 과격한 종교 및 사회 개혁을 부르짖었고 그리고 성령의 직접 계시를 주장했다. 그는 1520년경 동부 삭소니의 작은 마을인 쯔비카우로 가서 그곳에서 목회 사역을 했다. 그러나 그의 직설적인 설교가 종교적 및 사회적 문제를 일으켜 1521년 4월 쯔비카우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프라그로 가서 그의 입장을 설파했으나 별 성과가 없었다.

뮌쳐는 한동안 잠적해 있다가 1522년 비텐베르그에 나타나서 루터와 논쟁을 벌였고 1523년 봄에는 알슈테트(Alstedt)에 나타나 그의 신념을 설파하며 독일어로 된 새로운 형태의 예배 의식을 제정하여 시행했다. 그리고 “참으로 선택된 자들”을 함께 모으기 시작했다. 뭔쳐는 루터를 비난했고 루터는 뮌쳐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고 그를 정죄했다.

뮌쳐는 쯔비카우의 광신주의를 더욱 열렬히 주창하며 극단적인 영육의 대립을 강조했다. 유아 세례뿐 아니라 세례 자체를 거부했고 쓰여진 성경의 무용성을 내세웠다. “바이블, 바벨, 버불”이라고 지껄이며 성경을 조소했다. 성경은 영감을 받은 해석자가 없이는 아무 소용이 없다고 했다. 그 해석자는 교회도 교황도 아니고 새 엘리야요, 새 다니엘인 그 선지자라고 했다. 뮌쳐는 성령의 직접 계시에 근거하는 하나의 극단적인 개신교 신정 정치(Protestant Theocracy)를 주창했다. 그것은 땅과 혈통에 근거한 유대주의적 신정 정치도 아니었고 성례에 근거한 가톨릭주의적 신정 정치도 아니었다. 그것은 성령의 부음을 받는 내적 체험에 근거한 체험적 신정 정치였다. 성령으로 풍성한 자들은 피차 분별할 수 있고 선택자의 계약에 참여할 수 있고 하나님 나라 건설의 과업을 수행하게 된다고 했다. 중생은 극도로 감정적인 형태로 일어나는데 정확한 시간까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뮌쳐는 주님의 임박한 재림을 촉진시키기 위해 불의한 자들을 진멸하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진멸은 천사들에 의해 수행되는데 이 천사들은 지금 여기서 택함을 받은 성도들이라고 했다. 1523년 뮌쳐는 알슈테트(Alstedt)에서 임박한 재림을 강조하며 설교하기 시작했는데 2,000여명이 마을 밖으로부터 몰려들었다. 불의한 자들을 진멸하기 위해 30개의 진멸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로 칼을 빼지는 못했고 1524년 3월 카톨릭 교회의 마리아의 성당 하나를 불태웠을 뿐이다. 루터는 뮌쳐를 정죄하며 사탄이 알슈테트에 보금자리를 만들어 놓았다고 했다.

루터는 삭소니의 군주들에게 다음과 같이 글을 써서 보냈다! “이들 알슈테트의 무리들은 성경을 모독하며 영에 대해서 지껄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들인 사랑과 기쁨과 평화와 인내를 어디서 찾아 볼 수 있습니까? 그들이 말씀의 직무에 국한하고 있는 한 그들을 상관하지 마십시오. 그들이 칼을 뽑으면 개입해야 합니다. 범죄자들을 땅에서 쫓아내야 합니다. 우리의 직무는 단순히 설교하고 고난을 당하는 일입니다.”

1524년 뮌쳐는 바이말(Weimar)에 소환되어 프레데릭 영주와 다른 군주들 앞에서 설교하게 되었는데 이 때 뮌쳐는 군주들이 자기를 지원할 것을 호소했다. “하나님께서는 영혼의 심연 가운데서 내적 말씀으로 자신을 나타내십니다. 하나님의 산 증거를 받지 못한 사람은 10만 권의 성경을 삼켰을지라도 실로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족장들과 선지자들과 사도들에게 꿈을 나타나셨듯이 그의 사랑하는 자들에게 꿈으로 오십니다. 성령께서 지금 선택 받은 자들에게 앞으로 올 놀랍고 거슬릴 수 없는 개혁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삭소니의 군주들이여, 여러분은 이 계시를 여러분에게 밝혀주고, 여러분의 할 일을 보여줄 다니엘이 필요합니다. 여러분에게 칼이 주어진 것은 불의한 자들을 없애버리기 위함입니다. 복음을 조롱하는 신부들과 수도사들은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불의한 자들은 살 권리가 없습니다. 여러분도 느브갓네살처럼 다니엘 같은 사람을 임명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삭소니의 군주들은 뮌쳐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뮌쳐는 결국 밤에 알슈테트의 담벽을 넘어 삭소니에서 도망쳤다. 뮌쳐는 1524년 알슈테트와 삭소니를 떠났다가 1525년 봄 다시 삭소니로 돌아왔다. 때는 불만으로 가득한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던 때였다. 뮌쳐가 어느 정도 농민 전쟁에 관여했는지는 모른다. 농민들의 불만이 종교개혁운동 이전에 이미 나타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뮌쳐는 선택자가 불의한 자들을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결국 농민들을 선택자와 동일시했고 통치자들을 불의한 자들과 동일시했다.
루터는 뮌쳐를 가리켜 “사탄의 오른팔”이라고 불렀다. 루터는 폭력을 인정할 수 없었을뿐 아니라 선택자를 가려낸다는 생각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왕국을 땅 위에 세워 세상을 통치한다는 신정 정치의 이념을 받아들일 수도 없었다. 반면 뮌쳐는 루터를 가리켜 “거짓말 박사” “빗텐베르그의 교황”이라고 부르며 루터가 기독교 신앙을 너무 값싸게 만들었고 그리스도인의 헌신을 너무 가볍게 만들었다고 비난했다. 뮌쳐가 프란켄하우젠에서 벌어진 농민 전쟁에 가담하다가 농민들이 패하자 그의 운동은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는 전쟁 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다가 1525년에 처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