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브란트광장에 세워진 <야경> 기념물

안동대 미술학과 서성록 교수는 렘브란트 탄생 400주년을 맞아 지난 3일부터 8박 9일간 아들과 함께 네덜란드를 방문했다.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 van Rijn,1606-1669)는 ‘새로운 미술의 지평을 연 장본인으로, 탈 많았던 종교미술을 생동하는 프로테스탄트 정신으로 전환해 발전시킨 위대한 화가’라는 평을 받는 개신교 최고의 화가다. 서 교수는 지난 2001년부터 본지에 ‘서성록의 렘브란트 기행’이라는 제목으로 렘브란트의 삶과 예술에 대해 30여 차례 기고한 바 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책을 펴내기도 했다(도서출판 재원 「성서그림 이야기-렘브란트」). 본지는 서 교수의 네덜란드 탐방기를 6회에 나누어 게재한다.


도심 속에서도 비교적 호젓한 곳에 자리한 ‘렘브란트 광장’에 들어서니 며칠 전 릭스 미술관에서 본 <야경>이 우뚝 세워져 있었다. 사진으로는 실물 규모를 대충 짐작할 수밖에 없지만 실제로는 대단히 커서 시선을 압도할 정도였다. 러시아의 두 조각가(알렉산더 타라티노프와 미하엘 드로노프)가 제작했다는 안내문구가 적혀 있었고 <야경>에 대한 네덜란드인들의 자부심을 느껴볼 수 있었다.

무려 6년에 걸쳐 제작한 이 입체조형물은 일일이 점토로 형체를 빚은 다음 주물로 떠낸 브론즈 작품으로 엄청난 수고와 물량이 투자되었다. 조각가의 서툰 해석을 덧붙이지 않고 실제 <야경>에 나오는 22명의 인물을 고스란히 세우는 등 원작을 충실히 옮겨냈다. 비록 렘브란트의 <야경>은 아니지만 또 다른 기념비적 조형물로 방문객들에게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렘브란트 광장에서 약 5분쯤 걸었을까. 수로를 끼고 난 보도로 몇 걸음을 옮겼더니 렘브란트 하우스뮤지엄(Rembrandt House Museum)에 당도할 수 있었다.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는 이 건물은 렘브란트가 고향 라이덴을 떠나 암스테르담에서 처음으로 마련한 ‘드림 하우스’였다. 그가 이곳에 얼마나 애지중지 공을 들이고 애정을 쏟았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무려 4세기가 지났는데도 끄떡없이, 마치 몇십년 전에 지어진 것처럼 말끔한 용모를 간직하고 있었다. 옛 모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대가의 저택을 잘 간수해온 세심한 배려를 느낄 수 있었다.

건물은 두 채로 나뉘어져 있었다. 렘브란트가 원래 살던 건물 한 채, 그리고 다른 그 옆에 방문객이 입장하고 자료와 상품을 파는 뮤지엄샵이 있는 별채로 구분되어 있다. 이 건물은 부인 사스키아와 결혼한 뒤 1639년에서 1658년까지 화실겸 거주지로 사용하던 것이었다.

▲렘브란트 하우스 뮤지엄 전경
렘브란트와 그의 제자들이 드나들었던 현관문을 만져보니 감회가 남달랐다. 바로 이곳으로 렘브란트가 매일 드나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차 올랐다. 금세라도 렘브란트가 문을 열고 ‘누구세요’ 하며 나올 것만 같은 착각에 사로잡혔다. 어떤 미술애호가는 “렘브란트의 영롱한 붓 효과를 감상하려면 대가와의 대화도 나눌 겸 필히 렘브란트의 스튜디오를 방문해 보아야 한다(1635)”고 추천하였다. 그런데 지금 내가 이 집 앞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무슨 중세 고성(古城)에나 나옴직한 비좁은 나무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니 열 평 남짓한 조그만 방이 나왔다. 헛간같이 어두운 그 방은 자료보관실이었다. 작품을 그리는데 필요한 소도구를 보관해두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곳에는 그림으로만 보았던 조개, 투구, 창과 검, 석고들, 귀금속, 온갖 장식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렘브란트가 이 방에 들어와 그림에 필요한 장식들을 골라 나갔을 것을 생각하니 렘브란트 집에 와 있다는 것이 정말 실감이 났다.

북향으로 된 그의 스튜디오에 들어서니 조그마한 창문이 나 있었는데 바로 가정부 헨드릭케의 인물화, 그리고 ‘사색하는 철학자’에 나오는 그 장소였다. 350년 전과 다름없이 조그만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그 빛줄기는 여전히 실내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렘브란트의 전성기 시절에 나온 대표작들이 대부분 내가 서 있는 바로 이 <렘브란트 하우스 뮤지엄>에서 탄생한 것이라 생각하니 감회가 남달랐다. 미술관 측에서 그때의 작품을 다 소장하고 있지는 못하지만 일부 작품을 통해서나마 충분히 렘브란트의 회화와 판화가 지닌 높은 완성도와 예술적 수준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십자가에서 내려오심>(1633), <도마의 의심>(1635), <빌라도 앞의 그리스도>(1636), <세례요한의 설교>(1634-35), <매장>(1633-35), <수넴 여인의 출발>(1640) 등등.

특별히 이 미술관은 렘브란트의 성공과 실패, 좌절이 얼룩진 사연 많은 저택이다. 부유한 가정의 딸 사스키아와 결혼하여 승승장구하던 렘브란트는 혼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랑하는 아내의 죽음을 이곳에서 눈물을 훔치며 지켜봐야 했고 과도한 낭비와 은행부채를 갚지 못해 파산선고를 해야 했으며 결국 빈민촌으로 쫓겨 나가야 했다.

그런가 하면 이곳은 영적 성숙의 ‘도장(道場)’같은 곳이기도 했다.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속에서 화가는 하나님만을 바라는 것과 오직 그분만을 경외하는 법을 배웠다. 고난과 환란이 가중될수록 그의 신앙을 깊어만 갔고 그의 작품에 다른 화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영적인 광채가 더해졌다. 그가 고난을 통과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지금과 같은 렘브란트가 존재할 수 있었을지 의심이 든다.

이 위대한 예술가의 자산은 그의 뛰어난 솜씨가 아니라 영적인 깨달음, 다시 말해 진리의 소재를 분명히 파악하고 그 진리와 함께 인생을 보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서성록(안동대 미술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