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이 독일과 유럽 각처에서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발전했으나 시간이 감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종교개혁운동들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 중 루터와 쯔빙글리의 개혁운동이 중세 교회를 충분히 개혁하지 못하다고 규정하며 보다 철저한 개혁의 필요를 부르짖는 급진적인 과격파 개혁운동이 일어났다.


“칼슈타트의 과격(급진적) 개혁운동”

루터가 바르트부르그성 안에 숨어 있는 동안 빗텐베르그에서는 루터의 동료인 빗텐베르그 대학 교수 칼슈타트(Andreas Carlstadt, 1480-1541)의 지도 하에 보다 과격한 개혁운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칼슈타트는 본래 루터와 가까운 동료 교수였고 1512년 루터에게 박사 학위를 수여한 선배이기도 했다. 그러나 칼슈타트는 차츰 루터와 다른 신학적 입장을 취했고 두 사람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1520년 칼슈타트가 야고보서 강해를 하며 행위를 강조하자 루터는 이를 조소하며 비난했다. 루터가 1521년 12월 바르트부르그 성을 빠져 나와 빗텐베르그 거리에 잠시 나타났을 때 개혁운동이 소란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1521년 크리스마스 날 칼슈타트는 빗텐베르그에서 새로운 형태의 미사를 집례했다. 2,500명의 시민 중 2,0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칼슈타트는 평복을 입고 미사가 희생 제사라는 문구를 빼어버리고 짤막하게 요약된 라틴어로 미사문을 읽었다. 빵과 포도주를 분배할 때는 독일어로 바꾸었는데 빗텐베르그의 2,000여명 군중은 평생에 처음으로 미사가 자기 나라말로 집례되는 것을 경험했다. 이 정도는 루터도 인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빗텐베르그의 개혁운동은 점차 과격한 형태로 발전했다. 폭력이 나타났다. 신부들이 조소를 당했을 뿐 아니라 제단으로부터 머리칼을 붙잡혀 질질 끌려 나아갔다. 루터는 폭력을 결코 인정할 수 없었다. 칼슈타트는 영과 육의 대립을 강조하는 이원론에 근거하여 성상(images)과 음악과 성찬시의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부인했다. 성상은 눈을 자극하고 음악은 귀를 즐겁게 하고 육체적 임재가 입을 통해 나타난다고 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물질적인 것에 대한 경멸은 신부의 예복을 금하게 만들었고 칼슈타트는 농부들의 옷과 비슷한 검은 회색 옷을 입었다. 또한 칼슈타트는 루터의 만민제사장주의를 극단적으로 해석하여 사회적 평등주의(social equalitarianism)를 내세웠다. 칼슈타트는 자기를 “칼슈타트 박사”라고 부르는 대신에 “안드레 형제”라고 부르라고 했다. 성직자는 사례를 받을 것이 아니라 손으로 일을 해야 한다고 했다. 칼슈타트는 농장을 얻어 농부의 일을 했다.

한편 1521년 12월 27일 보헤미아 국경 근처에 있는 쯔비카우(Zwickau)로부터 3명의 평신도가 빗텐베르그에 도착하여 스스로 선지자들이라고 주장하며 빗텐베르그를 더욱 소란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전능자와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고 주장하며 더 이상 성경을 필요로 하지 않고 영만을 신뢰한다고 했다. 결국 빗텐베르그 시의회는 루터를 초청하기로 결정하고 루터에게 초청장을 보냈다. 루터는 그 초청을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빗텐베르그로 돌아오기를 결심했다. “복음이 빗텐베르그에서 악평을 받게 되었으니 안타깝습니다. 마귀가 역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귀에게 한 치의 양보도 할 수 없습니다.” 1522년 3월 초 빗텐베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질서를 회복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며 인내와 사랑을 호소했다.

칼슈타트는 “성상 제거에 관하여”(1522)라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그의 입장을 나타냈다. “교회 안에 성상을 두는 것은 내 앞에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제1계명에 어긋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에 순종하여 그것들을 제거해야 한다. 그림들로부터 배울 수 있는 것이라곤 육체적인 것을 존중하는 것 밖에 없지 않은가? 그리스도께서는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요6:36)고 말씀했다.”

칼슈타트는 “주님의 몸과 잔을 남용하는데 대하여”(1524)라는 글에서는 그의 성찬관을 다음과 같이 나타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몸과 잔을 해롭게 취하고 있다. 빵과 성찬은 죄사함을 성취하지 못한다. 주님은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하셨다. 기억이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불타고 생생한 방법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 그 지식은 뜨겁고, 불타고, 적극적이고, 강력한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그 지식을 소유한 자를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으로 변혁시킨다. 주님의 살과 피를 단순히 육체로 취하지 않도록 조심하라. 우리의 눈 앞에 우리가 가져야 할 것은 그리스도의 보이지 않는 큰 사랑과 비상한 순종과 놀라운 순결함이다. 이것을 가슴 깊은 곳에서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의롭다 함을 얻고 죄에서 자유케 된다. 그리스도를 앎으로 그리스도를 기억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칼슈타트의 주장에 대해 루터는 “성상과 성찬에 관한 천상 선지자들을 반박함”(1525년)이란 글에서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칼슈타트는 우리에게서부터 떠나 우리의 최악의 적이 되었다. 성상에 관해서 말하면 칼슈타트가 그것들을 부숴버릴 꿈을 꾸기 전에 나는 이미 우리가 성상들을 우리의 마음에서 제거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모세가 금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이지 십자가상이나 성자의 형상이 아니다. 그러나 이들 칼슈타트 파들은 성상들을 베어버리고, 싸우고, 치고, 부수고, 떠밀고, 때리고, 깨뜨리고, 파괴시키라고 부르짖는다. 칼슈타트는 반항적이고, 살인적이고, 분파적인 기질을 소유하고 있다. 내가 성상들을 변호하는 것은 아니다. 위에서 지적한 대로 모세의 법이 십자가 상이나 성자의 형상들을 금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것들은 기억하게 하는 표로 유익하고 칭찬할 만한 것이다. 그들은 항상 ‘영, 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모든 것이 내적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말하기를 ‘소량의 물이 어떻게 죄를 씻을 수 있고 빵과 포도주가 나를 도울 수 있느냐’고 말한다. ‘아니다, 아니다, 그리스도의 살을 영적으로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들은 ‘나와 같이 고요히 기다리라. 그러면 하늘의 소리가 너에게 임할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너와 더불어 말씀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그들은 성찬 예복을 입지 않고 회색 옷을 입을 뿐이다. 그들은 모든 칭호를 거부하고 ‘사랑하는 형제’라고 부른다. 나는 칼슈타트에게 경고하는데 그는 회개해야 한다.”

이에 대해 칼슈타트는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하여 어떻게 칼슈타트가 철회했는가?”라는 글에서 루터를 다음과 같이 공박했다. “새 교황이 나타나서 옛 교황의 말을 하고 있다. 십자가 위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피는 새 언약인데 그것은 죄 사함을 위한 영적 피 뿌림이어야만 한다. 나는 오직 분명하고 오류가 없고 확실한 성경의 증거에 의해 가르침을 받기를 원한다. 내가 도끼로 찍히고 마귀에 맡겨지면 어떻게 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