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역사의 숲은 역사의 나무들이 모여 형성된다. 전체로서의 역사는 개체로서의 역사가 있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무가 없는 숲을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역사의 나무들이 없는 역사의 숲은 생각할 수 없다. 역사의 나무들이 한 그루 한 그루 모여서 역사의 숲을 형성하는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모든 역사의 나무들이 역사의 숲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거기에서 배제되는 역사의 나무들 또한 허다하다. 그런데 역사의 나무들 중에는 중요한 의미를 내포한 것들이 있다.


한국교회의 역사라는 숲과 관련하여 볼 때, “만주 개신교의 창시자”로 불리는 존 로스(John Ross, 1842-1915)는 그 좋은 예이다. 비록 그의 공식적 신분은 스코틀랜드 연합장로교회(UPCS) 소속의 만주지역 선교사였지만, 그가 초기 한국교회의 형성에 끼친 영향을 크다고 할 수 있다. 조지 길모어(George W. Gilmore)가 “한국 개신교 복음화의 시작은 중국 우장(牛莊)에서 활동하는 존 로스 목사의 노력에 기인한다”라고 지적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는 한국교회라는 역사의 숲을 이야기할 때 종종 간과되는 경향이 있다. 그가 한국에 파송된 선교사가 아니라는 것이 그 이유 중의 하나이다.

존 로스는 스코틀랜드 북부의 닉(Nigg)이라는 지방에서 한 양복업자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이후 그는 에든버러에 있는 UPCS 신학원에서 신학교육을 받은 후, 갈릭(Gaelic)어 사용자들을 대상으로 사역하다가 1872년 UPCS 소속의 중국선교사로 파송 받았다. 그 해 10월에 그는 중국 지푸(芝罘)를 거쳐 영구(營口)에 도착하여 만주선교를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런데 장기간의 여행과 혹독한 중국의 겨울 추위에 적응하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던 아내가 1873년 3월 첫 아들을 낳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뜻하지 않은 위기 속에서 주저앉을 수도 있겠지만, 그는 결코 자신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중국어 학습을 통해 아내와의 사별의 슬픔을 이겨내는 동시에 천릿길이나 되는 전도여행을 떠났다.

1873년 가을에 있었던 제1차 고려문 방문은 그 결과로 일어난 것이었다. 그리고 이듬해 4월말에 한국어 어학선생을 찾기 위해 나섰던 제2차 고려문 방문을 통해 의주 출신의 이응찬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이응찬은 한약재를 잔뜩 싣고 고려문으로 가기 위해 압록강을 건너가다 돌풍(突風)으로 거센 파도가 이는 바람에 배가 전복되어 모든 물건들을 잃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상태였다. 그 결과 로스와 이응찬의 만남이 극적으로 이루어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한국의 복음화를 위한 로스의 열정이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러한 로스의 열정은 무엇보다도 성서번역을 위한 기초를 마련하는 작업으로 나타났다. 로스가 저술한 [한국어 교본](Corean Primer, 1877)과 [한국의 역사](A History of Corea, 1879)는 실례이다. 전자는 영어로 기록된 최초의 한국어 어학교재이며, 후자는 영어로 된 최초의 역사서이기도 하다. 이외에도 그는 한국어 성서번역 과정에서 [한국어 문법 및 단어집](Korean Speech with Grammar and Vocabulary)도 간행하여 이후 내한하는 선교사들의 한국어 학습 및 이해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2년에는 한글로 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출판하고, 이어 1887년에는 한글판 신약전서를 완간하여 한국선교의 신기원을 열어 놓았다. 물론 로스역본이 여러 면에서 완벽한 번역은 아니었지만, 1904년에 새로운 신약성서가 출판되기 전까지는 그것을 대신할만한 성서가 없었다. 따라서 일반 대중을 주 선교대상으로 생각하고 순수한 우리말로 번역을 시도한 로스역본이 한국교회의 형성에 끼친 영향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레이놀즈(W.D.Reynolds) 선교사는 로스의 신약성서가 초기 한국교회의 근간이 되었고, 특히 서북지역의 경이적인 부흥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로스의 선교사역은 한국교회가 자생적으로 시작할 수 있는 기초가 되었다. 한 예로 의주신앙공동체의 탄생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 출발점에는 의주출신의 청년들인 백홍준, 이성한, 김진기가 서 있다. 이들은 1879년 한문성서와 전도지를 읽은 후 구원의 비밀을 깨닫고 존 맥킨타이어(John McIntyre)를 찾아갔다.

거기서 로스를 도와 성서번역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들은 맥킨타이어에게 세례를 받은 후 복음전도를 위해 곧바로 의주로 돌아갔다. 하지만 복음전도의 일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니었다. 1880년에는 백홍준이 그 일로 투옥되어 3개월간 옥고를 치르며 거의 모든 재산을 잃어야 했다. 맥킨타이어가 한문성서와 전도지 등을 국내로 밀반입시키면서 백홍준에게 쓴 편지가 발각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홍준의 복음전파의 열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백홍준은 다시 맥킨타이어를 방문하여 자신이 당한 고난을 전했다. 이러한 신앙의 열정은 1880년 1년 동안 30여명의 한국인들이 맥킨타이어를 찾아가 학습교육을 받는 것으로 발전했다. 이처럼 한국인들에 의한 복음의 자발적인 수용은 국내 최초의 신앙공동체의 형성으로 나타났으며, 거주선교사 없이도 괄목할만한 신앙공동체로 발전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일례로 1887년 가을, 언더우드가 의주로 제1차 순회전도여행을 갔을 때, 그곳에는 100명 이상의 세례 지원자가 있었다. 그리고 1889년 4월, 언더우드가 신혼여행을 겸하여 순회전도여행을 갔을 때는 33명의 의주사람들이 압록강을 건너가 언더우드에게 세례를 받는 놀라운 역사가 있기도 하였다.

이러한 모든 역사는 외국선교사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복음의 말씀을 받아 씨를 뿌리기 시작한 선진들의 신앙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아내와의 사별이라는 슬픔과 그로 인한 위기 속에서도 결코 자신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던 존 로스가 자리하고 있다. 그러기에 그는 하나님의 사명(使命)보다 사명이라는 명목 하에 자신의 사심(邪心)을 채우기에 급급한 이 시대를 향해 거침없이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향한 진정성을 회복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