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국 성결교회는 동양선교회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동양선교회는 1901년 카우만 부부에 의해 시작된 초교파적인 신앙선교단체로, 처음부터 토착인 사역자 양성을 핵심적인 선교정책의 하나로 삼았다. 그리고 성서와 현장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성서학원은 바로 그 핵심 통로였다. 그래서 동양선교회는 가능한 빨리 선교지에 성서와 현장중심의 교육을 강조하는 성서학원을 설립하고자 했다. 거기에는 ‘현지인 선교는 현지인의 손으로’라는 선교비전이 크게 작용했다.


즉 한국인에게는 한국인이, 일본인에게는 일본인이, 그리고 중국인에게는 중국인이 복음을 가장 효율적으로 전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 결과 동양선교회는 100여년을 지나는 동안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최전선에서 놀랄만한 성과를 거두어 왔으며, 최근에도 40여 개국에 400여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며 그 승리의 행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런데 동양선교회도 대부분의 선교단체가 그렇듯이 그 시작은 아주 미미했다. 거기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신들의 평안하고 안일한 삶을 내려놓은 한 부부의 감동적인 신앙적 결단이 씨앗이 되었다. 카우만 부부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향한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구령을 위한 십자가를 지기로 헌신했던 것이다.

동양선교회 창립자인 찰스 카우만(Charles E. cowman)은 1868년 3월 미국 일리노이 주의 한 전통적인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결혼 후 한동안 아내와 함께 세속적인 삶을 즐기던 그는 은혜감리교회에서 회심을 체험했다. 이후 그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 틈틈이 성서학원에서 공부하는 한편 직장선교와 도시선교에도 힘을 쓰면서 선교에 대한 꿈을 키워갔다.

그러던 중 카우만은 본격적인 선교사역을 위해 감리교 선교부에 일본선교사로 지원하였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현재로는 일본에 선교사를 파송할 계획이 없다는 회신이었다. 이때 그가 접하게 된 것이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왕성한 성결운동을 전개하던 마틴 냅(Martin W. Knapp)이었다. 냅은 신앙사역(faith work)의 지지자였다. 일반적으로 신앙사역이란 기존교파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인 선교단체를 만들어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는 신앙으로 나가는 것을 말한다.

카우만이 신시내티에 머무는 동안 감리교 선교부에서는 카우만 부부에게 일본에 영어교사와 음악교사 자리가 각각 마련되었다고 통보해 왔다. 하지만 그때 카우만은 자신의 미래를 위한 새로운 전기를 맞고 있었다. 그것은 냅의 신앙사역에 의한 것이다. 카우만은 일찍이 심프슨과 피어선을 통해서도 신앙사역에 대해 들어 왔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카우만은 신앙사역에 대해 구체적인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냅의 신시내티 사역을 보면서 신앙사역이 보다 나은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이에 카우만은 오랜 기도 끝에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고 독자적으로 일본선교를 떠나기로 작정했다.

1900년 12월 어느날 아침, 카우만은 마태복음 20장 4절을 보이면서 부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님은 다시 저에게 이 말씀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내가 너희에게 상당하게 주리라.’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선교부와도 관계를 맺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선교하라고 명령하고 계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카우만은 이러한 신앙사역이 사도와 초대교회의 패턴을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감리교 선교부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일본선교를 추진하게 되었다.

그런데 카우만이 하나님만을 의지하기로 작정하였을 때,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다. 며칠 후 카우만 부부는 신시내티 교외에 있는 작은 교회의 초청을 받아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이때 어떤 여신도가 일본선교를 위해서 1불을 카우만의 손에 쥐어주었다. 그것은 동양선교회 최초의 선교헌금이었으며, 하나님께서 카우만의 신앙사역을 기뻐하신다는 징표이기도 했다. 또한 오늘의 동양선교회를 가능하게 해 준 첫 열매였다.

그러한 징표는 하나님의 성서학원에서 열렸던 크리스마스 집회에서 더욱 분명해졌다. 그 집회에서 카우만이 일본선교 계획을 발표했는데, 그곳에 참석했던 장로교의 한 장로가 깊은 영적인 체험을 한 후 카우만의 선교를 위해 300불의 수표를 보내왔다. 냅은 카우만 부부가 기도의 응답을 받고 기뻐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어느날 저녁, 그들은 말했다. ‘하나님이 응답하셨다. 우리는 2월에 일본을 향해 떠날 것이다.’… 나는 카우만이 수표를 공중에 흔들면서 ‘오 일본! 오 일본! 하나님께 영광! 오 일본!’하고 외치는 모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카우만의 일본선교를 위한 모금은 이렇게 이루어졌다. 카우만 부부에게 그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나아가겠다는 그들의 신앙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준이었다. 거기에서 믿음의 확신을 얻은 카우만 부부는 시카고에서 만국성결연맹의 주요 지도자들에게 안수를 받았다. 하나님의 거룩한 사역을 위해 자신들의 삶을 구별하기로 자원한 것이다.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나실인으로 서고자 자신들의 삶을 성별했던 한 것이다. 이어 그들은 1901년 2월 1일에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그달 22일에 동경에 도착했다.

이렇게 하여 동양선교회는 시작되었고, 20세기 선교역사의 한 폐이지를 감동적으로 장식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믿음의 1불이 만들어낸 기적이었다. 기적은 눈앞에 보이는 많고 크고 화려한 것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열매로 알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국교회가 “네 나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헌신의 비전을 잃지 않게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