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강변교회 담임)

루터의 종교개혁 중심에는 성경 말씀과 십자가의 그리스도가 있었고 그리고 은혜와 믿음이 있었다. 여기서는 루터의 성경관을 살펴본다.


“구원과 성경”

루터는 종교적으로 매우 민감한 청년이었다. 지옥의 공포가 늘 그를 사로잡고 있었다. 1505년 수도원에 들어가 8, 9년 동안 수도 생활을 하는 동안에도 항상 구원의 문제로 고민하고 있었다. 기도와 미사와 참회와 예배에 빠지지 않았고 때로는 3일씩 금식도 했다. 로마를 찾아 빌라도의 계단에 무릎을 꿇고 기어 오르며 기도도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허사였다. 루터는 점점 더 깊은 죄의 고민과 지옥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1514년(혹은 1513년) 가을 어느 날 루터는 빗텐베르그 어거스틴 수도원 탑 속의 서재에서 소위 “탑 속의 체험”이라고 불리는 복음적 체험을 가지게 되었다. 루터는 시편 22편 말씀을 읽으며 이해할 수 없는 놀라움에 사로잡혀 부르짖었다. “어째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어째서? 어째서?” 다음 순간 루터는 벼락에 맞은 듯한 놀라움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나 루터 대신, 나 루터 대신!” 루터 앞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제는 더 이상 무서운 심판자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 가득찬 구주의 모습이었다. 루터는 이제 새로 태어난 듯한 느낌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구원관에 있어서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볼 수 있다. 중세 교회는 구원과 은혜의 방편으로 성례 제도와 면죄부 제도를 내세웠었다. 루터는 이를 배격하고 성경이 구원과 은혜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요 열쇠임을 강조했다.

“그리스도 중심적 성경관”

1514년 빗텐베르그 탑 속에서의 복음적 체험을 가진 이후 루터는 성경 전체를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생생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루터에게 있어서 그리스도는 성경의 핵심이 되었다. “성경 전체는 비록 겉으로는 달리 보일지라도 그 속 뜻을 헤쳐 본다면 오직 그리스도에 대해 관심을 두고 있다.” 복음은 그리스도에 관한 이야기인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고 했다. “바울과 베드로도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편지들도 복음 이외에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선지자들의 가르침도 그것이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참되고 순수하고 적절한 복음이라고 할 수 있다.”

루터는 그의 「시편 강해(1513-1515)」에서 “나는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의 못박히심 이외에 다른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고 했다. 1517년 「일곱 고백의 시편」에서 루터는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토로했다. “나는 고백한다. 내가 성경에서 그리스도를 덜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만족하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발견하게 될 때 나는 결코 빈곤해지지 않는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아시지도 않으시고 우리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을 알기를 원하시지도 않는다고 나는 믿는다.” 모든 성경은 우리들에게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롬 3:21). 이와 같은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이야 말로 루터의 특징적 성서관이라고 하겠다.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

그리스도 중심적 성서관, 즉 성경 안에서 그리스도를 발견하려는 성서관은 루터로 하여금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게 만들었다. 루터에게 있어 “하나님의 말씀”은 정적인 쓰인 말씀이라기 보다는 살아서 말씀하시는 하나님(God who speaks)이시며 개인과 만나 말씀하시는 분이다. 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에서도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났지만 신약에서 가장 분명하게 나타나셨다. 즉 신약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적 그리스도로 나타났다고 했다.

루터는 “하나님의 말씀”인 그리스도와 쓰여진 말씀인 성경과의 관계를 기독론적인 표현을 빌어 설명하면서 (1)그리스도가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글자로 쓰인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나타나신다고 했고 (2)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운 아기 예수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한다면 강보와 구유를 쓰여진 성경에 비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강보는 소박하고 비천하지만 그 안에 누워있는 그리스도야말로 보화이시다.

루터가 성경과 “하나님의 말씀”을 구별하므로 성경에 대한 권위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한 것은 부인할 수 없으나, 루터 자신은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권위를 결코 약화시키지는 않았다. 루터는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영감을 의심치 않았다. 마치 성령의 감동으로 쳐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았던 것처럼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이 쓰여졌다고 했다. 쓰여진 말씀인 성경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했기 때문에 루터는 스스로 성경 번역에 온 정력을 쏟았고 그리고 성경 해석에 그의 온 생애를 다 바쳤던 것이다.

“성경 해석”

로마 교회의 인위적 성경 해석의 오류를 지적하면서 루터는 올바른 성경 해석은 인간의 이성이나 전통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얻게 된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성경의 문을 여시고 그 뜻을 설명해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그 뜻을 깨달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성령의 조명이 없을 때 성경은 어두움에 싸인 닫힌 책으로 남게 될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교훈(즉 회개, 죄, 은혜, 칭의 및 예배에 관한)이 성령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기 전에는 사람의 마음 속에 들어올 수 없다.

그러므로 루터는 하나님의 계시를 소유하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고 계시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성령의 조명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또한 칼슈타트와 쯔비카우 등 열광주의자들의 지나친 영해(영적 해석)와 비유적 해석을 배격하면서 역사적 및 문자적 해석을 주장했다. 루터는 고백하기를 “내가 수도원에 있을 때 나는 비유적 해석에 숙달하고 있었다. 나는 모든 것을 비유적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로마서를 강의하고 나서부터 나는 그리스도에 대한 참된 지식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리스도가 비유가 아님을 알게 되었다. 나는 그리스도가 실제로 누구신지를 알게 되었다.” 루터는 지나친 내적 조명과 직접 계시를 내세웠던 과격파들의 성경 해석에 반해서 어거스틴을 비롯한 초대교회의 전통적 성경 해석 방법을 적용하며 역사적 및 예표적 성경 해석을 채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