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한국교회의 전통 중의 하나가 부흥운동이다. 한국교회의 토대는 사경회와 기도회를 축으로 하는 부흥운동에 의해 다져졌으며, 실제로 부흥운동은 한국교회의 성장·발전에 기여한 일등공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부흥운동의 전통은 미국 남감리교 소속의 내한선교사들을 통해 한국교회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들어와 그들의 선교구역인 개성 등에서 간헐적으로 부흥이 일어나면서 한국교회에 부흥의 전조를 보냈고, 1903년의 원산대부흥운동과 1909년의 백만인구령운동을 주도하면서 부흥운동의 큰 산맥을 형성해 갔다.


이후 그러한 전통은 1910년대 말의 진흥운동을 통해 그 맥락이 이어지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 보아 그때부터 부흥운동의 전통은 감리교 내에서 서서히 주변부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 요인으로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 감리교 선교정책 및 신학적 변천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신학과 신앙은 교회의 생명력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이다.

감리교는 1910년대 들어와 그들의 초점을 직접전도에서 점차 사회 및 문화선교에 맞추기 시작했고, 그러한 변화는 3·1운동 이후 더욱 두드러졌다. 그리고 신학의 방향도 성서의 권위를 철저히 신뢰하던 초기의 입장에서, 변화하는 현대사회와 문화에 맞추는 쪽으로 설정되었다. 결국 이는 성서에 대한 순박한 신앙에서 비롯된 세상과의 구별보다는 세상과의 동화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신자들을 이끌며 영적 생명력의 약화 내지 상실을 초래했다. 이에 대해 박용규 교수는 “1920년대 현대사회와 문화에 대한 조정이 계속되는 동안 영적 생명력을 잃어간 것이다”라고 평한다.

이러한 변화는 결국 1920~1930년대 한국 감리교의 전반적인 침체로 이어졌고, 그 결과 선교의 동반자였던 장로교와의 격차는 더욱 현격하게 벌어지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 감리교 일각에서는 심각한 위기의식의 대두와 함께 이대로는 안 된다는 자성이 일어나면서 직접전도의 전통을 되찾고자 하는 노력들이 시도되었다.

1925년 9월 20일, 남감리교가 종로에 세운 경성중앙전도관은 그러한 몸짓의 하나였다. 남감리교회는 내한선교 30주년을 앞두고 대대적인 부흥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1925년을 부흥의 해로 선포했다. 그리고 경성중앙전도관을 상설로 개설하여 전도를 활성화하고, 3·1운동을 전후해 벌여왔던 진흥운동의 정신을 계승하기로 했다. 관장에는 1909년 백만인구령운동의 주역이었던 스톡스(M. B. Stokes) 선교사가, 부흥사에는 원익상이 임명되었다. 이후 경성중앙전도관은 1926년에는 집회참석자 23,210명 중에 2,179명, 1927년에는 20,917명 중에 3,121명의 결신자를 내는 등 꾸준히 새신자를 얻으며 전도의 활력을 회복하고자 애썼다.

경성중앙전도관을 통한 전도운동은 1930년 12월 2일 남북감리교가 조선 감리교로 합동한 후에도 계속되었다. 감리교는 1931년에 스톡스를 관장에, 피도수(Victor W. Peters)를 부관장에, 그리고 원익상을 총무에 임명하여 기존의 전도사업을 확대 개편했다. 그 와중에 하디 선교사는 「신학세계」에 두 차례에 걸쳐 한국감리교 부흥운동의 필요성과 시급성을 다루면서 영적각성과 부흥운동을 위한 노력에 힘을 실어주었다.

스톡스도 「신학세계」 1932년 11월호에 “개인전도와 조선교회”라는 글을 실고 “금일 조선의 중대 문제”가 한국교회의 전도열을 진흥시키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리고 “25년 전에는 교회의 중요사업이 사람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일에 있었지만 지금에는 우리의 주요한 노력을 이 세상에서 생활할 생활 상태를 개선함에 두는 것 같다”고 지적하면서, 교회 본연의 사명인 복음전파에 진력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또한 감리교의 위기는 “재정문제, 농촌문제, 교육문제, 청년문제 등으로” 거듭거듭 토의하는 데 지쳐서 복음전파에 사용해야 할 능력과 시간을 잃어버리는 데 있다고 통렬히 지적한다. 이는 교회의 사회적 책임은 강조하면서 복음전파를 게을리하는 현대교회를 향한 간절한 외침이기도 했다. 스톡스는 오늘날 조선교회에는 무엇보다도 새로운 오순절을 요하며, 따라서 30년 전 조선교회를 불태웠던 오순절 경험이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역설했다. 한국교회의 가장 시급한 전도열은 성령충만을 받는데 있음을 환기시켜 준 것이다.

한편, 실제로 스톡스는 부관장 피도수, 총무 이원상과 함께 전도사업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들은 서울에만 국한하지 않고 포천군, 시흥군, 고양군 등 그 사역의 범위를 서울 근교까지 확대했다. 그리고 그 사역은 서울 인근 지역에 신설교회의 설립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원동, 용산, 신설리, 포천 가계리, 답십리, 성북동의 교회들을 들 수 있다. 물론 경성중앙전도관 전도집회로 인해 얻어진 결신자들이 감리교로만 보내진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하상천 씨는 한강에 투신자살하려다가 1927년 4월에 중앙전도관 집회에 참석하여 결신한 후 대구의 성결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가 1934년에 장로로 임직을 받기도 했다.

이 경성중앙전도관 사업은 1934년 12월까지 거의 10년 동안 계속되었으며, 하루도 휴관하지 않고 매일 저녁 전도집회가 열렸다. 그 사역의 결과 총 참석자 149,459명 중에 19,009명이 결신했으며, 7개 교회에 5개의 예배처소가 생겨났다. 10년간의 전도활동에 비추어 비록 그 결과가 미흡한 것일 수 있지만, 1926년부터 1934년 말까지 한국교회가 영적 위기를 만나고 있을 때 단 하루도 중단하지 않고 구령사역을 계속했다는 것만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최근 한국교회는 성장의 침체로 인해 심각한 진통을 겪고 있다. 이와 관련해 일각에서는 교회개척에 대해 깊은 회의론를 제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구령운동으로서의 복음전도는 포기할 수 없는, 아니 결코 포기해서는 안 되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실제로 역사는 교회의 생명력이 구령운동에 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