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교황은 1520년 6월과 1521년 1월 두 번 루터를 파문하는 파문장을 보냈다. 결국 1521년 4월 독일 보름스(Worms)에서 루터를 심문하기 위해 신성로마제국의 의회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찰스 5세(Charles V, 1500-58)에 의해 열렸다.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Here I Stand)

독일 국민은 이 회의에서 황제의 힘으로 종교적인 싸움이 해결되기를 기대하였다. 반면에 교황의 대표 알레안더(Aleander)는 루터를 곧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루터는 왕후, 귀족, 성직자들, 신학자들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의 후원과 프레데릭의 보호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제국의 황제도 루터는 쉽게 처형하지 못했다. 프레데릭은 황제에게 루터를 처형하기 전에 그를 심문하고 그에게 자기 변호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했다. 이 두 틈에 끼인 황제는 1521년 4월 16일 루터에게 보름스에 출두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라인강 상류 연변에 위치하고 있는 보름스에 소집된 신성로마제국 회의는 루터의 생애의 절정을 이루었다. 로마 교황의 권위와 면죄부를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이단의 낙인을 받게 된 루터에게 최후적인 재판이 벌어지게 된 것이었다. 친구들은 굳이 만류하였다. 그러나 루터는 비록 그를 대적하는 적의 수가 보름스 의회 지붕 위의 기왓장 같이 많다고 할지라도 단연코 가야 한다고 했다. 루터는 민중들의 열광적인 환송과 축복의 함성을 받았다. 그는 몇몇 친구들과 같이 앞뒤에서 민중의 호위를 받으며 4월 16일 회의장에 들어섰다.

1521년 4월 17일 루터가 황제와 제국의 최고의회 앞에 섰다. 로란드 베인톤 박사는 이 중요한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여기서 과거와 미래가 만났다. 바로 이 시점에서 우리는 현대의 시작을 본다.” 트리에르 대감독의 하수인인 엑크(라이프찌히 논쟁 때의 에크가 아님)가 황제 대신으로 루터를 소환한 이유를 설명했다. 그는 루터의 저서들을 루터에게 제시하면서 그것을 고수할 것인지 철회할 것인지를 심문하였다.

루터는 들릴까 말까 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 책들은 모두 나의 책이요, 그리고 그것보다 더 많이 썼소.” 엑크는 다시 물었다. “그대는 그것들을 전부 변호하는가 혹은 일부분을 철회하는가?” 루터는 큰 소리로 대답했다. “이것은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관련되며 영혼들의 구원과 관련됩니다. 그리스도는 말씀하시기를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그를 아버지 앞에서 부인하겠다고 하셨습니다. 너무 적게 말하는 것이나 너무 많이 말하는 것은 모두 위험합니다. 다시 생각할 시간을 주시기 바랍니다.” 루터가 너무 두려워했는지 모른다. 황제도 에크도 놀랐다. 그러나 황제와 에크는 루터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4월 18일 그날은 왔다. 마침내 루터는 황제와 제후와 그밖의 고급 관리들 앞에 서서 그의 신앙과 신념을 피력했다. 그의 목소리는 분명하게 울려 퍼졌다. 엑크는 전날의 질문을 반복했다. 루터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당신은 어제 나에게 이 책들이 나의 책인지 그리고 내가 그것들을 철회하는지를 물었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나의 책이오, 그러나 둘째 질문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모두 한 종류의 것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어떤 것은 신앙과 생활 문제를 단순하게 그리고 복음적으로 취급합니다. 그래서 나의 원수들까지도 그것은 읽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둘째 종류의 것은 악한 생활과 교황들의 교훈으로 세상이 황폐된 것을 지적합니다. 셋째 종류의 것은 개인들에 대한 공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엑크는 다시 말했다. “마르틴, 그대는 그대의 책들을 충분히 구분하지 못했다. 초기의 것들은 악하고 후기의 것들은 더욱 더 악한 것뿐이다. 그대는 위클리프와 후스의 오류를 반복하는 것뿐이다. 뿔로 받지 말며 솔직하게 답변하라. 그대는 그대의 책들과 그 속에 포함된 잘못들을 철회하는가 하지 않는가?”

루터는 이제 정중하고 분명하게 답변했다. “귀하가 나에게 단순한 대답을 요구하시니, 나는 뿔로 받거나 이를 드러내놓지 않고 답변 하겠소. 성경과 명백한 이성에 의해 확신되지 않는 한 나는 교황들과 종교 회의들의 권위를 수락하지 않겠소. 왜냐하면 그것들은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요. 내 양심은 하나님 말씀에 사로잡혀 있소.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도 없고 하지도 않겠소. 양심을 거스르는 것은 옳지도 안전하지도 않소. 하나님이여, 나를 도와주소서! 아멘.” 어떤 사본에는 “여기 내가 서 있다. 나는 달리 할 수 없다”(Here I Stand, I cannot do otherwise)는 말을 추가했다고 했다.

이런 루터의 완강한 태도에 대해 보름스 의회는 즉시 어떤 처단을 내릴 수는 없었다. 퇴장할 때 그는 독일인들에게 둘러싸였다. 그러나 루터는 군중을 위로하면서 숙소로 갔다. 프레데릭 선제후는 후에 루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논평했다. “마르틴 박사는 황제와 귀족들 앞에서 훌륭하게 말했다. 내가 보기에 그는 너무 대담했다.” 황제는 루터에게 안전 보증서를 주어 귀환시키기로 하였으나, 루터가 귀로에 오른 지 얼마 후에 황제는 루터의 체포령을 내렸다. 그러나 교황청이나 황제도 이 독일 국민의 영웅을 잡아 죽일 수는 없었다. 루터가 귀가의 길을 떠난 지 8일 만인 4월 26일 도중에서 프레데릭 영주는 비밀히 자기 병력을 보내어 루터를 잡아다가 자기의 바르트부르그성에 숨겨두었다.

몇 달 동안은 실제로 루터가 숨어 있는 곳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로마 교회를 공격하는 그의 글이 계속 나타났으므로 그가 살아서 이 싸움을 이끌어가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 이 시기야말로 또 하나의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그는 이 바르트부르그성에서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1521년 12월에 시작하여 1522년 9월에 완성하여 출판하였다. 루터는 헬라어 원문에서 번역하였다. 루터 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있었으나 라틴어 Vulgate에서 번역하였기 때문에 표현이 까다롭고 읽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그는 특수한 어학의 재능으로 일반이 잘 이해할 수 있는 국어체인 독일 말로 성서를 내놓는 것이다. 이 공헌이야말로 루터가 남겨놓은 업적 가운데서 가장 의의 있는 금자탑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리고 1534년에는 드디어 신구약 성서가 전부 완성되었다.

루터는 마지막까지 개혁 운동을 전개하다가 1546년 2월 18일 그의 출생지인 아이스레벤에서 63세에 세상을 떠났다. 루터가 일으킨 ‘종교개혁’은 매우 광범하게 다방면에 걸쳐 깊은 각성과 개혁을 일으킴으로써 서양사상, 아니 후세 전 인류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계속 정치, 경제, 교육, 윤리, 철학, 문학 그 밖의 여려 지도적인 면에 철저한 변혁을 일으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