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라이프찌히 논쟁(1519년) 이후 루터는 일약 국가적 영웅으로 그리고 국제적 인물로 등장했다. 루터의 저서들이 프랑스, 스페인, 영국, 스위스 그리고 로마에까지 배포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은 당시의 인문주의(Humanism)와 국가주의(Nationalism)와 합세해 크게 확장되었다. 종교개혁과 인문주의는 그 이념과 방법에 있어서 공통점이 많았고 상호 격려의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근본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종교개혁의 이념이 인문주의나 국가주의의 이념과는 달랐다. 후텐과 지킨겐은 억압받는 독일 민중 편에 서서 민중운동을 펴나가면서 루터에게 무력적 협조를 제공하며 도우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이와 같은 제안에 대해 “나는 그들을 멸시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개혁의 이념”

마르틴 루터의 생애 가운데서 1520년은 여러 면으로 중대한 해였다. 로마 교회와의 대립이 격화됨에 따라 그는 외적으로 비난, 공격, 위협 및 저주를 받았으며 동시에 예찬과 격려도 받았다. 1520년은 이 모든 것이 그 절정에 달한 해였다. 교황은 1520년 6월에 루터에게 60일 이내에 로마에 오지 않으면 파문한다고 소환장을 보냈다. 그러나 루터는 그 소환장을 불태웠다. 로마 교회에서는 그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그와 그의 저서들을 없애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이에 대해 루터는 자신의 태도를 분명히 밝히고 종교개혁의 의미를 명백히 해 주는 그의 작품들을 출간했다. 루터의 많은 저서들 가운데 1520년에 나온 작품들은 유달리 빛나는 것들이었다. 그 작품들은 1520년 5월에 발표된 「선행론」, 8월에 출판된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 10월에 출판된 「교회의 바벨론 포로」, 12월에 출판된 「크리스천의 자유」였다.

1) 선행론(The Sermon on Good Works). 소책자로 출판된 이 저서는 평민적이고 교화적인 문체로 개혁 정신을 잘 나타내며 신앙과 선행의 위치와 관계, 믿음의 근본적인 동기 및 율법에 관한 문제를 간명하게 다루었다. 여기서 그는 최고의 선행은 “그리스도를 신뢰하는 것”이라고 규정하고 하나님께 구원 얻는 길은 교회에서 명령하는 기도, 금식, 자선 같은 인간의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뿐이라고 했다. 하나님의 계명을 알고 지키는 것은 선행 중에서 가장 으뜸이며 고귀한 것이다. 계명 가운데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다른 모든 계명보다 앞선다.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만을 신뢰하고 믿어야 한다. 그의 선행론은 로마 교회의 선행론과 정반대적이었다.

2)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 보내는 서한(The Address to the Christian Nobility of the German Nation). 불타는 확신과 유창한 독일어로 쓰여진 이 논문은 금방 독일 전 지역에 유포되었다. 이 저서는 세속권을 높이 인정하면서 독일 기독교인 통치자들이 종교개혁에 적극 참여하고 지원할 것을 역설했다. 새 여호수아가 일어나 로마에 있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리게 될 것이라고 암시하면서 첫째는 교회의 권세가 세속권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성벽, 둘째는 교황만이 성서를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벽, 셋째는 교황만이 종교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성벽이라고 했다.

(1) 첫째 성벽에 대하여 루터는 만민 제사장설을 내세우며 세속 통치자들의 종교적 기능과 권한을 높이 주장했다. (2) 둘째 성벽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당나귀를 통해서 교황을 얼마든지 경고하실 수 있다” 라고 말하면서 평신도들 가운데 오히려 선지자들 보다 더 경건한 신자와 바른 믿음과 은사를 가진 자가 많다고 하였다. (3) 셋째 성벽에 대해 루터는 “예루살렘 회의는 베드로에 의해서 소집된 것이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에 의해 소집되었다”고 지적했다. 그리고 종교회의가 제정하여야 할 개혁안을 제안했다.

① 교황청의 사치를 일소하고 사도적 검소함을 본받아야 한다. 교황의 3층 왕관과 발 키스를 금해야 한다. ② 교황은 세속 통치를 포기하고 종교적 사건에만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③ 교황청에 바치는 세금이 마치 밑 빠진 가방 속에 돈을 넣는 것과 같은데, 각국의 통치자들은 시민들이 교황청에 세금을 내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④ 종교 소송을 로마에서 하지 말게 할 것이다. ⑤ 성지순례를 금할 것이다. ⑥ 갖가지 축제일을 폐지하고 주일날만 성수할 것이다. ⑦ 성직자의 결혼을 허용할 것이다.

이와 같이 이 글 전체를 통해 로마 교회의 타락을 지적하면서 그리스도의 겸손과 청빈을 대조적으로 묘사했다.

3) 교회의 바벨론 포로(The Babylonian Captivity of the Church). 이것은 루터의 저서 중에서 가장 조직적인 신학적 논문의 하나였다. 에라스무스는 이 글을 읽고 “로마와의 분열은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고 부르짖었다. 루터는 이 글에서 성례(Sacraments)가 오류와 남용에 의해 교회에 포로로 사로잡히게 되었다고 지적하며 로마 교회의 성례 제도를 맹렬히 공격했다. 보름스(Worms) 국회(1521년)에서 루터가 심문을 받을 때 그에게 제시된 책이 바로 이 책이었는데, 루터는 이 책이 자기의 책인 것과 그 책의 내용을 긍정했다. 루터는 이 책에서 7성례를 하나씩 논하면서 그 중 성찬과 세례만 인정하였다. 그리고 다른 예전들인 견신례, 혼례, 안수례, 고해성사, 종부 성사는 성례로 인정하지 않았다. 루터가 안수례를 하나의 성례로 보지 않고 그것을 배격함으로 그는 중세의 사제주의(clericalism)를 깨뜨리고 만민제사장주의(priesthood of all believers)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4) 크리스천의 자유(The Freedom of the Christian Man). 이 논문은 1950년 10월 교황 레오(Leo) 10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첨가된 글이었다. 이 논문은 30개조로 된 작은 글이나 진주와 같은 글이었다. 이 논문 가운데서 루터는 크리스천의 자유를 아래와 같이 총괄하였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충분한 것은 믿음뿐이다. 그는 의로워지기 위해서 선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 선행이 그를 선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선한 사람이 선행을 만든다. 사람이 신자와 크리스천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선행은 아무런 가치가 없다. 그렇다고 우리가 선행을 거부하는 것은 아니다. 높이 예찬한다.”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에 대하여 가장 자유로운 주인이며 아무에게도 예속되지 않는다. 한편 크리스천은 모든 사람에 대해 가장 책임이 많은 종이며 모든 사람에게 예속되어 있다.”이 두 가지 명제는 크리스천의 본질을 밝히 보여주는 말이며 서로 모순된 것 같으나 가장 근본적인 크리스천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크리스천은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고 그리스도와 이웃을 위해서 사랑으로 산다. 그는 믿음으로 자기를 너머(above himself) 하나님에게 이르고 그리고 사랑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자기보다 아래로(below himself)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