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에서 루터는 보다 담대했다. 이번에는 교황의 권위와 아울러 교서의 권위를 부인했다. 성경의 권위와 이성으로 무장된 신자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

이에 대해 추기경 카제탄은 성경은 해석되어야 하는데 교황이 성경의 해석자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황은 종교 회의보다도 성경보다도 그리고 교회 안의 무엇보다도 우월하다고 했다. 루터는 “교황이 성경을 우롱하고 있다. 나는 교황이 성경보다 우월함을 부인한다”라고 응수했다. 케제탄 추기경은 화가 나서 다음과 같이 호통을 쳤다. “루터가 ‘철회한다’고 말하지 않는 한 여기를 떠나서 결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때 루터는 고향에 편지하기를 카제탄은 문제를 해결할 능력이 없으니 마치 당나귀가 하프를 타는 격이라고 했다. 그 당시 만화가들은 교황을 그리면서 하프를 타는 당나귀 모습으로 그렸다.

카제탄은 곧 냉정을 되찾고 슈타우핏츠와 저녁을 먹으면서, 루터에게 슈타우핏츠보다 더 가까운 친구가 없으니 루터의 마음을 변화시켜 보라고 했다. 슈타우핏츠는 자기의 능력으로는 루터를 설득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나는 가끔 루터를 설득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루터는 나보나 능력이 뛰어나고 성경을 구사하는 데 있어서 나보다 월등합니다. 당신이 교황의 사절이니 당신의 손에 달렸습니다.” 추기경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다시는 루터와 말을 하지 않겠소. 사실 그의 눈은 연못과 같이 깊고 그의 머리에는 놀라운 상상력이 있습니다.”

루터는 카제탄이 자기를 체포할 권한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밤에 몰래 도망쳤다. 뉴른베르그로 도망을 친 것이었다. 뉴른베르그에 숨어 있다가 10월 30일 비텐베르그로 돌아왔다. 추기경 카제탄은 루터와의 면담 내용을 프레데릭 영주에게 보내면서 루터를 체포하여 로마로 보내든지 그를 추방하라고 했다. 한편 비텐베르그로 돌아온 루터는 카제탄과의 면담 내용을 자기의 입장에서 써서 인쇄에 붙여 프레데릭 영주를 더욱 곤란하게 만들었다. “교황의 교서를 부인한다고 해서 나쁜 크리스천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누구든지 복음을 부인하면 이단이다. 나는 교서를 저주하고 증오한다. 그 교서에 관해서 그리스도의 공로가 면죄의 보화가 된다는 것을 나는 부인한다. 그의 공로는 교황과 상관없이 은혜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공로는 죄를 제거하고 공로를 증가하지만, 면죄부는 공로를 제해버리고 죄만 남겨둔다. 이 아첨자들이 교황을 성경보다 높이고 교황은 잘못을 범할 수 없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 성경은 폐하게 되고 교회 안에는 인간의 말만 남게 될 것이다.”

1518년 11월 28일 루터는 종교회의를 열어 자기를 심문해 줄 것을 호소했다. 이와 같은 처사에 대해 프레데릭 영주는 당황하고 어떤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루터는 위험을 느끼며 피신할 각오를 했다. 그때 오스트리아의 잘스브르그로부터 슈타우핏즈의 편지가 날아왔다. “세상은 진리를 미워합니다. 비텐베르그를 떠나 내게로 오시오. 함께 살다가 함께 죽읍시다. 버림을 받은 우리는 버림을 받은 그리스도를 따릅시다.” 루터는 교인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친구들을 초대하여 저녁을 같이 했다. 바로 두 시간 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루터의 입장을 옹호하는 프레데릭 영주의 편지가 도달했다. 루터는 편지를 받아 들고 너무 기뻐하면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비텐베르그에 남아 있기로 했다.

1518년 11월 9일 교황청은 면죄부에 대한 공식 견해를 나타내는 교서 Cum Postquam을 발표했다. 면죄부의 교리가 아직 교황의 공식 승인을 받지 않았으므로 루터를 이단으로 단정하기가 어려웠고 면죄부에 대한 해석이 지나쳤기 때문이었다. 종전까지는 면죄부를 삼으로 형벌(penalty)뿐 아니라 죄책(quilt)까지도 사해진다고 가르쳤으나 이제는 오직 형벌만 면할 수 있고 죄책은 참회의 성례를 통해서 사해진다고 했다. 그리고 지옥의 형벌을 사하는 것이 아니고 지상에서와 연옥에서 받을 형벌만 감해주는 것뿐이라고 했다. 지상에서 받아야 될 형벌은 교황이 사할 수 있으나 연옥에서 받아야 될 형벌은 교황이 그리스도와 성자들이 쌓아 놓은 공로를 하나님께 드리며 기도하는 것뿐이라고 했다.

교황청의 정책이 이처럼 완화되었음도 불구하고 루터는 계속 교황권을 공격하며 교황과 종교 회의는 잘못을 범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교회법의 일부는 성경과 모순된다고 지적했다. 그러므로 도미니칸들은 그를 가리켜 ‘악독한 이단’이라고 불렀고, 교황은 그를 가리켜 ‘죄악의 자식’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추방도 못하고 당장 끌어오지도 못했으니 정치적 이유 때문이었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은 1519년 1월 12일 신성 로마 제국 황제 막시밀리안(Maxmilian)이 죽어 후계자를 택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때 두 후보자가 나타났는데 프랑스 출신 프랜시스(Francis)와 스페인 출신 찰스(Charles)였다. 이 두 사람의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로마 교황청은 이들보다 독일의 프레데릭(Frederick) 선제후가 황제가 되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그래서 교황은 프레데릭 선제후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으려 했다.

로마 교황청은 프레데릭 영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특사 밀팃즈(Carl von Miltitz)를 그에게 보내어 많은 특권을 부여했다. 프레데릭이 소장한 성자들의 뼈 하나에 연옥에서의 형벌 100년을 감해주는 특혜를 부여했다. 그리고 황금의 장미를 선사하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이 지극히 거룩한 장미는 성유와 향수가 뿌려졌고 교황의 축복을 받은 꽃이다. 이 장미는 우리 주님의 가장 귀한 보혈을 상징한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하나님의 향기가 귀하의 마음 속에 스며들게 하며 밀팃즈가 그대에게 지시하는 것을 다 수행할 것이다.”

독일에 도착한 밀팃즈는 루터가 이제 자기 손 안에 들어 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나 독일 국민들을 만나보고 나서 교황 지지 세력보다 루터 지지 세력이 3배나 강한 것을 발견하고는 1천년의 역사를 통해 루터만큼 교회에 해를 끼친 자는 없었다고 한탄했다. 그리고 1만 두캇을 쓴다 해도 루터는 잡아야 한다고 했다.

밀팃즈가 루터에게 면죄부에 대한 교황의 새 교서를 받아들이라고 요구하자 루터는 교서가 성경을 한마디도 인용하지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밀팃즈는 루터에게 공개 토론이나 출판을 삼가 주기를 바란다고 부탁했다. 교황청이 삼가면 자기도 삼가겠다고 약속하자 밀팃즈는 눈물을 흘렸다. 루터는 이를 보고 악어가 거짓 눈물을 흘린다고 논평했다. 밀팃즈는 또한 자기들의 허물을 숨기기 위해 텟젤에게 누명을 씌워 그를 정죄했다. 즉 여행할 때 사치했으며 불륜의 자식 2명을 가졌다고 했다. 텟젤은 수도원에 파묻혀 억울함에 사무쳐 죽어갔다. 그러나 루터는 오히려 텟젤에게 편지하여 그를 위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