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루터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1517년 만성절(All Saints) 전날 밤인 10월 31일 루터는 비텐베르그의 성곽교회(Castle Church)의 문에 95개 조항(The Ninety-Five Theses)을 게시하고 이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를 원했다.


교황청의 반응

루터가 95개 조항을 성곽교회 정문에 게시했을 때 그것을 널리 퍼뜨려 대중을 선동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다만 그 책임자에게 도전하여 그 설명을 들으며 학자들 사이에서 토론을 하려는 것이었다. 루터는 95개 조항의 한 사본을 마인츠의 알버트 감독에게 보내며 다음과 같은 글을 첨부했다. “땅의 찌끼와 같은 제가 존귀하신 당신께 접근함을 용서하소서. 거룩하신 당신께서 먼지와 같은 이 글을 살피시고 나의 탄원을 들으소서. 당신께서 나의 명제들을 살펴 보신다면, 면죄부의 교리가 얼마나 의심스러운 교리인 것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알버트는 그 사본을 교황 레오 10세에게 보냈다. 교황은 그것을 보고 나서 다음과 같은 논평을 했다고 전해진다. “술 취한 독일 사람이 그 글을 썼는데 술에서 깨어나면 다른 사람이 될 것이다.”

루터의 95개 조항은 인쇄공에 의해 수주 안에 독일 전역에 퍼져 읽혔다. 독일 국민의 반 이탈리아 감정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당황한 교황청은 루터의 행동을 제재할 대책을 세웠다. 루터가 속해 있는 어거스틴 교단을 통해 루터를 제지해 보려고 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교황은 도미니칸 교단의 실베스터 프리에리아스(Sylvester Prierias)를 사절로 보내어 루터에게 답변하도록 했다.

1518년 7월 프리에리아스는 루터를 대면하고 그의 입장을 공격했다. 초점을 면죄부에 두지 않고 교황의 권위에 두며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보편적 교회는 실제로 로마교회를 말한다. 로마교회는 추기경들로 구성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교황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편적 교회가 신앙과 도덕에 있어 오류를 범할 수 없음과 같이 종교회의나 로마교회나 교황은 공적 지위에서 말할 때 잘못을 범할 수 없다. 누구나 로마교회나 교황의 가르침이 무오한 신앙의 규칙이며 성경의 권위를 부여하는 근원이 됨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이다. 면죄부와 관련해서 로마교회가 실제로 하는 일을 부인하는 자는 이단이다.” 프리에리아스는 루터의 잘못을 반박하며 그를 가리켜서 놋쇠 머리와 철의 코를 가진 문둥병자 같은 녀석이라고 욕을 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다음과 같이 신랄하게 반박했다. “내가 텟젤을 멸시했지만 그는 너보다는 똑똑했다. 너는 성경이라곤 하나도 인용하지 않는구나. 너는 주장만 하지 이유를 대지 않는다. 너는 악독한 마귀와 같이 성경을 왜곡한다. 너는 교회가 교황으로 구성된다고 말하는데, 교황들의 꼴을 보아라. 율리우스 2세의 피 흘린 범죄, 보니페이스 8세의 잔학한 독재를 보아라. 그들은 격언이 말하는 대로 늑대와 같이 나서 사자와 같이 다스리고 개 같이 죽지 않았느냐? 너는 교회가 추기경들로 구성되었다고 말하니 종교회의는 무엇으로 구성되었는가? 너는 나를 문둥병자라고 부르는데 그래도 나에게 약간의 진리가 있음을 인정하니 다행이다. 너는 교황을 권력과 폭력을 누리는 황제로 만드는데 막시밀리안 황제와 우리 독일 국민은 이를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루터의 답변의 극단적인 점은 교황과 종교회의는 오류를 범할 수 있지만 오직 성경만이 궁극적인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한 점이다.

한편, 교황은 이미 6월에 루터의 로마 소환을 명하는 소환장을 보낸 일이 있는데 이 소환장이 1518년 8월 7일 루터에게 도달했다. 60일 이내에 로마에 출두하여 이단에 대한 심문을 받으라는 내용의 소환장이었다. 루터는 이튿날 프레데릭(Frederick) 영주에게 편지하여 이전의 약속대로 자기의 심문이 로마에서 행해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달라고 부탁했다. 결국 끈질긴 협상 끝에 루터의 심문이 독일의 보름스 국회(Diet of Worms)에서 행해지도록 합의됐다. 그러나 보름스 국회에서의 심문이 있기 전에 아우그스버르그(Augusburg)에서 열리는 제국의회에서 추기경 카제탄(Cajetan)과의 개인적인 심문을 하기로 프레데릭 영주가 주선했다.

교황 레오 10세와 황제 막시밀리안은 이 계획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루터를 잡게 되기를 바랐다. 교황은 프레데릭 영주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사랑하는 아들이여, 사도의 축복이 그대 위에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가 듣는 대로 죄악의 자식인 마르틴 루터가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고 있다는데 그가 당신의 지원을 받고 있다는 것이오. 그것이 헛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신의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기를 바라오. 루터의 가르침에 이단이 섞여 있다는 충고를 들었으므로 이제 그를 추기경 카제탄 앞에 서도록 했소.”

아우그스버르그로 가는 루터는 공포와 근심에 사로 잡혀 있었다. 그때의 공포는 3년 후 보름스 국회에서도 보다 훨씬 심했다고 나중에 술회했다. “나는 이제 죽는구나.” 루터는 중얼거렸다. 그는 도중에 위장염으로 기절할 뻔할 정도였다. 그는 또한 자기 자신만이 옳고 모든 세대가 잘못에 빠졌다고 주장하는 자기 주장이 참으로 옳은가 하는 회의에 빠지기도 했다.

루터는 드디어 아우그스버르그에 도착하여 10월 12일부터 14일까지 3일간 카제탄과의 논담을 벌였다. 첫날 카제탄을 만났을 때 루터는 겸손히 무릎을 꿇었고 카제탄은 손을 들어 그를 일으켰다. 그리고 루터를 향해서 그의 잘못을 취소하라고 했다. 잘못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카제탄은 가장 큰 잘못은 교회가 소장하고 있는 공로의 보화(Treasury of Merit)를 루터가 부인한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교황 클레멘트 6세의 교서를 보여주며 여기 “그리스도의 공로가 면죄의 보화이다”(that the merits of Christ are a treasure of indulgences)라고 씌어 있지 않느냐’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루터는 교서가 정말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면 취소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교서는 “그리스도가 그의 희생으로 보화를 획득했다”(that Christ by his sacrifice acquired a treasure)고 기록하고 있지 않느냐고 따졌다. ‘이다’와 ‘획득했다’는 같은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지적하며, 독일 사람들이 문법도 모르는 무식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안된다고 했다.

이와 같은 답변은 사리에 맞지 않는 억지 답변이었다. 궁지에 몰린 당황한 루터가 교서의 권위를 부인하지도 않고 자기의 입장을 취소하지도 않으려 하면서 만들어낸 억지 답변이었다. 카제탄과의 두번째 논담에서 루터는 보다 담대했다. 이번에는 교황의 권위와 아울러 교서의 권위를 부인했다. 사람이 만들어낸 불확실한 교서 하나 때문에 분명한 성경의 증거들을 취소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종교회의는 물론 성경의 권위와 이성으로 무장된 신자는 교황보다 우월하다고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