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를 향해 서글픈 이별을 고했다.

“수도사가 된 루터”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청년 루터는 두 주 후인 1505년 7월 17일 에르푸르트에 있는 어거스틴 수도원에 들어갔다. 그가 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것은 수도사의 소명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의 영혼을 죽음의 공포에서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천국에 이르는 지름길이 수도사가 되는 길이라는 중세 교회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원장 앞에서 엄격한 수도원 생활의 규칙을 따를 것을 서약했다. 즉 자신의 의지를 죽이고, 소량의 음식을 먹고, 남루한 옷을 입으며, 밤에는 기도하고, 낮에는 일하며, 육체를 죽이고, 가난의 치욕과 구걸의 부끄럼을 당하며, 수도원에 갇힌 싫증나는 생활을 감당해 나갈 것을 엄숙히 서약했다.

성가대가 노래하는 가운데 채발식이 거행되고, 수도사의 옷으로 갈아입음으로 1년 동안의 견습 수도생활이 시작됐다. 루터는 최선을 다해 견습 수도생활을 영위해 나아갔다. 수도원에서 인정을 받았고 1년 후에는 수도사의 서약을 하고 수도사가 되었다(Bainton, Here I Stand, pp.30-38).

그러나 루터가 사제로서 첫 미사를 집행했을 때 그는 또 하나의 벼락에 맞는 듯한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제단 위에 빵과 포도주가 사제의 성례 집행으로 하나님의 살과 피로 바뀌는 변화의 이적이 일어나고 갈보리의 희생이 반복된다고 생각했을 때 루터는 두려워 떨었다. “나는 티끌과 재이며, 죄로 가득한데 어떻게 감히 살아계시고 영원하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대면하고 말할 수 있는가?” 루터는 벼락을 맞은 듯 떨며 부르짖었다. 번뇌(Anfectung)의 시련을 경험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번뇌와 시련은 오랫동안 루터의 영혼을 사로잡게 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계속 수도 생활에 최선을 다했다. 때로는 3일씩 금식했다. 그는 수도원 규칙 이상으로 몸을 괴롭히고 기도에 힘썼다. 루터는 그 당시의 형편을 후에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나는 훌륭한 수도사였다. 나는 수도원의 규칙을 매우 엄격히 지켰다. 만약 수도사가 그의 수도에 의해 천국에 간다면 그것은 바로 나였다.”

그와 같은 수도의 모든 노력이 루터에게 평안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루터의 근본적인 번뇌는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는 데 있었다. 산상 보훈의 말씀이 너무 높고 너무 어려워 아무도 그것을 지킬 수 없다고 괴로워 했다(Bainton, Here I Stand, pp.39-46).

중세 교회는 죄의 형벌의 문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성자들에 의해서 축적된 많은 공로가 교회에 의해서 죄인들에게 부여될 수 있다는 면죄부(indulgences) 제도를 만들었다. 특히 성자들의 유물을 바라보며 규정한 면죄부를 살 때 죗값으로 받아야 할 현세와 연옥에서의 형벌이 수천년씩이나 감면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로마는 성자들의 유물을 수없이 많이 소장한 거룩한 도시요 영원한 도시였다.

마침 1510년 에르푸르트의 어거스틴 수도원에서 논쟁이 생겼는데 이에 대한 교황의 자문이 필요하게 되었다. 두 사람의 대표가 선정되었는데 루터가 그 일원으로 선정되어 로마를 방문하게 되었다. 로마에 한 달 머무는 동안 루터는 교황의 자문을 받는 사무를 마친 후 모든 시간과 정력을 성자의 공로를 힘입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바쳤다. 성당에서 매일 미사를 드렸고 카타콤과 유적들을 방문했다.

“로마여, 안녕!”

루터는 후에 기록하기를 그 당시 이태리 사제들의 무식함과 경박함과 부도덕과 불신앙을 목격하고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고 했다. 그러나 루터는 절망하지 않고 라테란 성당을 찾아가 그곳에 있는 Scala Sancta라고 불리는 28계단으로 된 ‘빌라도의 계단’을 손과 무릎으로 오르기 시작했다. 빌라도 앞에서 그리스도가 올라섰던 계단이라고 전해지는 계단을 주기도문을 외우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면 연옥에서의 형벌이 감해진다고 중세 교회가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루터가 계단마다 입을 맞추면서 28계단을 다 올라 갔으나 그의 마음에는 아무런 평안이 없었다. 그는 부르짖었다. 전설이 전하는 바대로 이때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고 외치지 않았고 “이게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렸다(Bainton, Here I Stand, pp.46-51).

로마에 대한 루터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졌다. 로마에서 발견한 것은 종교적 경건이 아니라 시궁창과 같은 부패였다. 부푼 기대를 가지고 로마를 찾아왔으나 서글픈 환멸을 안고 로마를 떠나게 되었다. “로마여 안녕! 거룩한 삶을 살기를 원하는 자들은 모두 로마를 떠날지어다. 로마에서는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정직한 사람이 되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다.” 루터는 로마를 향해 서글픈 이별을 고했다.
린지(Lindsay)는 그의 「종교개혁사」에서 웅변조로 지적하기를 “루터는 하나의 중세 신학자로 로마에 갔다가 하나의 개신교도가 되어 돌아왔다”고 했으나 이는 과장된 표현이다. 루터 자신이 지적한 대로 “양파를 가지고 갔다가 마늘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묘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로마에서 돌아온 루터는 에르푸르트에서 비텐베르그(Wittenberg)의 어거스틴 수도원으로 옮겼다. 여기서 어거스틴 종단장 슈타우피츠(Johann von Staupitz)를 만나게 되는데 그는 영적인 지도자로 루터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루터는 후에 고백하기를 “내가 슈타우피츠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지옥에 빠졌을 것이다”라고 했다.

비텐베르그는 당시 프레데릭(Frederick the Wise)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는 후에 루터의 정치적 보호자가 되었다. 루터는 자기 영혼을 죄악의 공포에서 구원하기 위해 선행의 방법을 시도해 보았으나 자기 자신을 구원할 만큼 충분한 선을 행할 수 없음을 발견했다. 성자들의 공로를 힘입어 보려 했으나 결국 의심과 회의로 그치고 말았다. 루터는 이제 비텐베르그에서 새로운 ‘참회’의 방법으로 영혼의 평안을 얻어 보려고 힘썼다. 한번 죄에 대해 고해(penance)를 시작하면 때로는 6시간 동안 계속하기도 했다. 작고 보잘것없는 것에서도 그는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