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은 인간의 어떤 노력이나 성취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마르틴 루터는 깨닫게 되었다.”


“개혁 전야의 독일”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인 분위기에 휩싸여 있었다. 3만명이 거주하는 콜론(Cologne)이란 도시 안에 1백여개 이상의 교회와 기도 처소가 있었고 1백여개의 수도원이 있었다. 감동을 주는 종교의식이 곳곳에 성행했고 모든 주위가 온통 종교적인 것으로 특징을 이루고 있었다. 그 당시 베스트셀러의 하나는 「옳게 죽는 방법」(The Art of Dying) 이라는 종교 서적이었고, 성자와 성물의 숭배는 극에 달하고 있었다. 성자의 이름을 따라 아이들의 이름이 지어졌고 신도들은 거의 매주마다 어떤 성자를 기념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었다.

삭소니(Saxony)의 영주 프레데릭(Frederick)이 모아 놓은 성물은 엄청나게 많았다. 프레데릭은 유럽 각처를 여행하며 성물들을 모아 들였는데 1509년에는 5,005가지의 성자의 유물들을 소장하고 있었고 그것은 연옥에서 1443년간의 형벌을 감할 수 있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예수님의 이마를 찔렀던 가시를 비롯하여 성 제롬의 이빨 하나, 성 크리소스톰의 이빨 4개, 성 버나드의 이빨 6개, 성 어거스틴의 이빨 4개, 성모 마리아의 머리카락 4개, 옷 3조각, 허리띠 4조각, 예수님의 피가 묻은 마리아의 면사포 7조각, 예수님의 강보 한조각, 구유 13조각, 한단의 짚, 동방 박사가 가져 왔던 금 한조각, 몰약 3개, 예수님의 수염 1개, 예수님의 손을 못박았던 못 1개, 최후의 만찬 때의 떡 한조각, 예수님이 승천할 때 딛고 섰던 돌 한조각, 모세의 불붙는 떨기나무 한가지 등등을 소장하고 있었다.

1520년에는 성자들의 뼈만 해도 19,013개에 달했는데, 이와 같은 성물들을 보고 교황이 하사하는 면죄부를 산다면 1,902,202년 270일간의 연옥에서의 형벌을 감할 수 있다고 했다. [Roland Bainton, Here I Stand: a Life of Martin Luther (New York: Abingdon Press, 1950), pp.69f].

즉 종교개혁 전야의 독일은 매우 종교적이었으나 그것은 미신적 종교 의식에 치우친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였다. 한편, 교황은 유럽 각국의 교회에 대한 절대적 권한을 행사하고 있었으니, 모든 승려와 감독들은 교황에 의해 선출•임명되었고 승려와 감독들은 그 나라 통치자에 의해 지배되지 않고 직접 교황에 의해 지배되었으며 세금도 직접 교황에게 바치고 있었다.

“루터와 그의 청년 시절”

교회 역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을 이룩한 16세기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1483년 11월 10일 중부 독일의 아이스레벤(Eisleben)에서 7남매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루터의 아버지 한스(Hans)는 본래 농부 출신이었으나 광부로 전향한, 자주 정신이 강하고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의 어머니 마가레타(Margaretta)는 부지런하고 충실하고 단순한 성격의 여자였다. 그들은 경건했으나 그 당시 미신적인 중세 가톨릭교회의 신앙을 따르는 신자들이었다.

루터는 어려서부터 엄격한 종교교육을 부모로부터 받았고 만스펠트(Mansfeld)에서 초등교육을, 1497년 마그데부르그(Magdeburg)에서는 고등교육을, 1498년 아이제나하(Eisenach)에서는 대학 예비 교육을 받았고, 18세 되던 1501년 5월에는 ‘작은 로마’라고 불리는 에르푸르트(Erfurt) 대학에 입학했다. 1502년 9월에 학사학위(B.A)를, 1505년 1월에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루터는 대학에 재학하는 동안 경건한 가톨릭 신자였으며 양심적이고 부지런한 학생이었다. 그러나 그는 깊은 죄의식을 항상 느끼고 있었다. 루터가 깊은 죄의식을 느끼고 있었던 환경적 요인을 몇가지 들 수 있다.

첫째, 엄한 가정교육이 루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루터는 기록하기를 “어머니는 내가 호도 한개 훔쳤다고 피가 나도록 회초리로 때렸다”고 했고 “한번은 아버지가 나를 회초리로 때려서 도망친 일이 있는데 아버지가 밉게 느껴졌다”고도 기록했다.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났으므로 하나님도 엄하게 보였을 것이다. 둘째, 엄한 학교교육이 루터의 마음을 무겁게 했다. “학교에서 어떤 때는 하루 아침에 아무 이유없이 15대의 회초리를 맞았다. (라틴어의) 명사와 동사 변화를 반복해야 했는데 아무것도 배운 것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셋째, 그 당시 독일에 만연된 미신 사상이 루터의 마음을 어둡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숲과 바람과 물 속에 요정들과 귀신들과 유령들과 마녀들이 모여서 산다고 믿고 있었다. 루터 자신도 기록하기를 “곳곳에 귀신들과 마녀들이 들끓고 있다”고 했다. 넷째, 중세 교회의 가르침이 루터의 마음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했다. 중세 교회는 의도적으로 공포와 소망을 번갈아 가며 주면서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지옥의 공포와 아울러 성례와 면죄부를 통한 사죄의 길을 제시해 주었고 하나님을 때로는 아버지로,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로 보여 주었다. 그리스도도 때로는 구속주로, 때로는 무서운 심판자로 보여주었는데 성모 마리아와 그리고 그의 어머니 성 안나를 통해 그리스도의 진노를 무마시킬 수 있다고 가르쳤다. 루터는 심판자 그리스도의 모습 앞에서 완전히 공포에 사로잡혔었다고 고백했다.

종교적으로 민감한 청년 루터는 에르프르트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해인 1505년 찌는 듯이 무더운 7월 어느날 슈토테른하임(Stotternheim) 마을 근처의 시골길을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마을 가까이 왔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고 소나기가 쏟아지며 천둥이 대지를 흔들기 시작했다. 어둠을 가르는 번개와 뇌성 벽력에 루터는 땅에 엎드려지고 말았다. 그리고 공포에 사로잡혀 부르짖었다. “성 안나여, 나를 도우소서. 나는 수도사가 되겠습니다.”

베인톤 교수가 그의 루터 전기 「Here I Stand」의 첫 페이지에서 지적한 대로 “성자의 이름을 부른 이 청년이 나중에는 성자 숭배를 배격하게 되었고, 수도사가 되겠다고 서약한 이 청년이 나중에는 수도원 제도를 거부하게 되었고, 가톨릭 교회에 충성을 바치겠다고 하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중세 가톨릭주의의 구조를 깨뜨려 버렸고, 교황에 대한 헌신을 다짐했던 이 청년이 나중에는 교황을 적그리스도라고 부르게 되었다.”(Here I Stand, p.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