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 역사의 발전 과정에 비추어 볼 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종교개혁은 지난날 역사 발전 과정에서 빚어진 잘못과 오류들을 시정하고 개혁하여 본래적 기독교의 모습을 되찾자는 ‘회복 운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종교개혁을 가져올 수밖에 없게 했던 역사적 요인들로는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 ‘국가주의’와 ‘인문주의’의 흥기, ‘스콜라 신학의 붕괴’, 중세기 말의 ‘신비주의’ 및 ‘종교적 경건’을 들 수 있다. 지난번 ‘교황청의 부패와 타락’에 이어 여기서는 ‘국가주의’와 인문주의’의 흥기를 살펴본다.


“국가주의(Nationalism)”

14세기에 접어들면서 스페인, 영국, 프랑스는 국가로서 형성되는 과정에 있었다. 이들 국가가 점차 정치적 독립을 이룩하게 되자 중세 교회에 맞서서 일어나게 되었다. 왕은 자기 영토를 다스리는 황제로, 그리고 자기 영토 안의 교회를 다스리는 교황으로 자처하게 되었다. 따라서 이들 신흥 국가들과 교황청과의 갈등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니 영국과 프랑스는 자기 나라의 돈이 국경을 넘어 로마로 가는 것을 반대하게 되었다.

프랑스 왕 필립 IV는 프랑스 교회가 로마에 세금을 바치는 것을 금했고 프랑스 성직자들의 수입의 반을 자기가 친히 받아들였다. 이에 대해 로마의 교황 보니페이스 VIII(Boniface)는 1296년 교서를 통해서 교황의 허가 없이 징세하는 왕이나 왕에게 세금을 내는 성직자들을 파문하겠다고 위협했고, 1302년에는 둘째 교서(Unam Sanctam)를 통하여 모든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하여 로마 교황에게 복종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교황 보니페이스 VIII의 위협은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그 이후 프랑스, 영국, 독일을 비롯한 유럽 각국의 왕들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는 점차 교황의 권위를 무시하고 왕권을 내세우게 되었다. 독일의 선제후요 후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가 된 바바리아의 루이 IV(Louis IV of Bavaria)는 교황 요한 XXII와 맞서서 싸우며 왕권 신장에 힘썼으며 1338년 독일의 선제후들이 교황의 승인 없이 독립적으로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를 선출할 수 있다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황제 루이 편에 서서 교황과 맞서서 싸우며 국가의 권위를 높이 주장했던 사람이 파리 대학의 학장이었던 마르실리우스(Marsilius of Padua, 1275-1342)였다. 그는 그의 저서 「평화의 수호자」(Defensor Pacis)에서 국가와 국민의 권위를 높이면서 교회는 국가와 국민에 전적으로 예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대 민주주의 이념을 주창한 선구자였다고 하겠다.

마르실리우스와 함께 황제 루이 편에서 국가의 권위를 높이 주장한 다른 한 사람은 영국인 윌리암 옥캄(William Occam)이었다. 그는 “교회와 국가는 둘 다 하나님이 세운 것으로, 서로가 동등하고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므로 교회는 세속 통치권을 가질 수 없고 순전히 종교적 기능만을 행사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각국에서 일어난 국가주의와 민족주의는 교황권의 몰락을 촉진시켰고 종교개혁운동을 성공으로 이끈 배후의 힘이 되었다고 하겠다.

“인문주의(Humanism)”

15세기 중엽부터 시작하여 16세기 중엽에 이르는 동안, 즉 문예부흥(Renaissance)이라고 불리는 기간 동안 이탈리아를 비롯하여 스페인, 프랑스, 독일, 영국 등 각지에서는 희랍 로마의 고전을 연구하며 중세교회 구조의 모순과 부도덕을 드러냈다. 또 인간의 존엄성, 개인의 내면적 경건과 윤리 생활 및 사회 개혁을 부르짖는 인문주의(Humanism)가 일어났다. 인문주의가 중세 교회와 스콜라 신학을 정면으로 도전하고 공격하지는 않았지만 교황권과 스콜라 신학의 붕괴를 촉진시켰으며, 인문주의가 종교개혁을 낳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종교개혁을 위한 준비적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인문주의의 특성을 몇 가지 지적하면 다음과 같다.

(1) 새로운 인간성을 내세웠다.
이탈리아의 젊은 인문주의자 피코 델라 미란돌라(Pico della Mirandola, 1463~1494)는 그의 저서「인간의 존엄성」(The Dignity of Man)에서 “인간은 자기의 운명을 조정할 수 있는 자기의 주인”이라고 말하며 사람은 자유의지를 사용하여 동물처럼 타락할 수도 있고 신과 같은 높은 형태로도 승화하여 하나님과의 연합에 이르기까지 상승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인간 본성의 선함과 무한한 가능성을 강조했던 인문주의자들은 낙천적인 인생관을 표명했으며 인간과 사회를 개선할 수 있다고 믿었다.

(2) 중세교회의 모순과 부도덕을 풍자했다.
인문주의자들은 중세 교회의 모순과 부도덕을 정면으로 공격하기 보다는 풍자적으로 지적했다. 교회가 너무 타락했으므로 정면으로 도전하여 싸울 의욕조차 느끼지 못했을 것이며, 교황들 자신이 문예부흥을 지원하고 있었으므로 대항하여 싸울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보카치오는 떠돌이 수사가 기발한 방법으로 신도들을 우롱하여 금품을 거둬들이는 이야기를 풍자적으로 기록했고, 에라스무스는 「바보 예찬」(Praise of Folly)에서 교회의 약점과 모순을 풍자적으로 지적했다.

(3) 고전에 대한 문헌 비판이 일어났다.
인문주의자들의 고전 연구열은 동시에 고전에 대한 문헌 비판을 가하게 만들었다. 로렌조 발라(Lorenzo Valla)는 문헌 비판의 방법을 적용하여 「콘스탄틴의 기증 문서」(Donation of Constantine)가 콘스탄틴 황제 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8세기에 만들어진 위조문서임을 밝혔다. 그는 또한 12사도가 사도신경의 12조항을 하나씩 고백하여 만들었다는 전설의 허위성을 들춰내기도 했다. 결국 교황의 권위를 지원해 오던 교회 문서들의 위조성이 드러나게 됨으로 교황의 권위는 땅에 떨어지게 되었다.

(4)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 나타났다.
인문주의자들은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특수성을 내세우는 교리적 논쟁이나 종교적 억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며, 타 종교에 대해 관용의 태도를 갖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니콜라스(Nicolas of Cusa)는 세계 종교들이 하나의 공통된 신앙을 기반으로 연합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토마스 모어(Thomas Nore)는 「유토피아」(Utopia)에서 세계 종교가 함께 예배하는 사원을 묘사했으며, 에라스무스는 종교의 본질은 평화와 통일이라고 강조하면서 타 교파와 종교에 대한 관용의 태도를 중요시했다.

인문주의는 교회의 권위보다는 인간 개인의 존엄성과 가능성을 높이고 신학적 논쟁이나 종교적 의식보다는 내면적 경건과 윤리 생활을 중요시하면서 중세교회의 모순과 부도덕을 풍자적으로 지적함으로, 결국 교황권의 몰락을 촉진시켰고 종교개혁 운동에 박차를 가하는 촉진제의 역할을 했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