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회신학대학교 김명용 조직신학 교수

Ⅰ. 개혁교회의 성령론

Ⅱ.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

1.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개요
2.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장점
3.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단점

3)오순절 운동 속에서는 소위 기적이 일어났다는 수많은 주장들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주장들의 신뢰성에 관한 것이다. 오순절 운동 속에서는 이따금씩 죽은 자가 부활했다는 주장도 들을 수 있다. 발터 홀렌베거(W. Hollenweger)는 다음의 사실을 보도했다.

“미국 침례교 목사였던 브랜햄(William Branham)은 자신이 예언한 대로 1965년 성탄절에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죽었다. 이 사고는 브랜햄이 차를 몰고 갈 때에 술에 만취한 젊은이가 차를 몰고 와서 부딪쳤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이듬해 1월 25일에 엄청난 기적적인 복음화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고 그에 의해 예언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1월 25일에 그가 부활할 것으로 믿었기 때문에 그의 시신을 썩지 않게 기름을 바르고 냉동보관했다. 그런데 1월 25일에 부활하지 않아 1966년 부활절까지 날짜를 연기했다. 유럽의 오순절주의자들이 브랜햄이 죽었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몰랐던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1966년 부활절에도 브랜햄이 부활하지 않자 비로소 그의 장례가 치루어졌다.”

한국에서도 한 교회에서도 죽은 소녀가 부활했다는 소녀부활사건이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다. 오순절 교회에서는 수많은 기적이 보고되고 있지만, 매우 의심스러운 것들이 많다.

20세기 한국 오순절 교회의 급격한 성장은 신유가 일어나고 기적이 일어난다는 것과 깊은 관계가 있었다. 신유와 기적에 대한 소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오순절 교회를 찾았다. 그러나 최근 10여년 동안 신문이나 TV와 같은 많은 언론매체의 기자들이 신유와 기적의 사실성을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이를 밝혔다. 그런데 그 결과는 매우 부정적이었다. 최근에 한국의 오순절 교회의 성장은 멈추었다. 한국의 교회에 대한 불신이 한국인의 가슴 속에 깊어지고 있다. 이 불신 때문에 전체 한국교회의 성장도 멈추어져 있다.

4)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주로 관심을 갖고 있는 성령론이다. 능력전도나 능력목회 같은 표현은 오순절 운동을 표현하는 상징적인 표현들이다. 이러한 능력의 대한 강조는 오순절 교회의 초자연주의의 특징의 일환이다. 그런데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성령의 능력에 대한 강조는 강하지만 성령의 최고의 은사인 사랑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 수많은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을 성령의 은사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이것은 그들의 성령론이 특이하고 신비한 어떤 것만을 은사로 보는 편향된 경향 때문이다. 바울에 의하면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모두 성령의 은사인데 그 중에 제일가는 은사는 사랑이다(고전12~13장).

사랑은 율법의 핵심적 정신이고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정수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의 기둥도 사랑이다. 사랑은 이웃에 대한 책임과 역사에 대한 책임을 내포한다. 진정한 하나님의 능력 역시 사랑 속에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세상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었다. 벨커에 의하면 사랑이 하나님의 능력이 현존하는 공적 영역이다. 사랑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의 장소”이다.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의 전능한 능력은 십자가의 사랑의 무능 속에 존재했다. 오순절주의자들은 사랑이 성령께서 걸어가는 길이고 성령의 가장 귀한 은사라는 점을 더 깊이 배워야 한다.

5)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은 방언, 신유, 예언과 같은 은사에 주로 집중하는 성령론이다. 그런데 바로 여기에서 하나의 중요한 비판과 질문이 제기된다. 이 비판과 질문의 핵심은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의 역사성의 결여이다. 몰트만은 그의 1997년에 출간된 최근의 성령론의 ‘삶의 원천’에서 다음과 같이 오순절 교회의 성령론을 비판했다.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 같은 오늘의 일상의 삶 어디에 오순절주의자들이 존재하고 있는가?”

오순절 운동은 구체적 역사적 현실로부터 개인적 종교적 희망의 세계로 도피하는 경향을 갖고 있다. 그런데 성령운동이 구체적인 역사적 현실 세계의 곤경을 해방하는 하나님의 해방운동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그것은 사적 종교적 영역에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비정치적, 사적인 종교로 변하게 되고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고자 하는 성령의 활동과의 관계가 매우 약해지게 된다. 몰트만에 의하면 성령 안에서의 삶의 표준은 예수를 따르는 것이고 또한 예수를 따르는 제자도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정치나 평화운동이나 환경운동 속에서 예수의 제자도를 실천하는 오순절주의자들은 보기가 매우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