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삼위일체론

1.1.1. 사도신경


초대교회의 4가지 주제들, 즉 로마제국, 핍박, 교부, 이단 가운데 어느덧 마지막 주제인 이단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지도 꽤 됐다. 많은 사람들이 외치고 있는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구호의 진정한 의미를 알고 싶었던 성민은 오늘도 큰 기대 속에서 수업에 임하고 있다. 교수님의 강의가 시작됐다.


“지난 시간까지 ‘이단’이란 주제 아래 ‘영지주의’에 대해 배웠습니다. 그리고 영지주의적 이단 사상들도 살펴 보았습니다. 예를 들면, 몬타누스를 따르는 몬타누스파와 마르키온이었습니다. 이들을 1~2세기에 있었던 이단들이었다고 하면 3세기에 이르러는 본격적인 이단들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이단성의 대상은 바로 삼위일체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사상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여긴 이유는 믿음의 중요한 내용은 바로 ‘신론’에 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초대교회에서 우리에게 전해 준 믿음의 형식, 즉 공식은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사도신경’입니다. 이 외에도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 ‘칼케돈 신조’ 등이 있는데요. 그 가운데 우리는 ‘사도신경’을 예배 때마다 읽고 있죠.”

“교수님! 질문이 있는데요. 2006년 1월 호 ‘빛과 소금’이라는 월간잡지에 나온 내용인데요. 교수님이 말씀하신 ‘사도신경’에 관한 내용이죠. 이 내용에 적힌 것을 그대로 받아들여도 되는지요?”하고 김요셉 씨가 물었다. 그러자 “그래요. 제가 잠시 보도록 할까요?” 교수님은 요셉 씨로부터 잡지를 받아들고 읽어보았다. 그러신 후, “예, 좋은 내용입니다. 특별히 이 부분인데 요셉 씨가 읽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사도신경
‘사도신경’이 만들어지게 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어. 하나는 이단들에 반대하기 위함이고. 다른 하나는 세례 시에 신앙고백을 위함이었지. 1세기부터 기독교인들에게 악영향을 끼친 ‘영지주의’가 있었단다. 이 ‘영지주의’는 물질세계가 악하고 영적세계가 선하다고 하는 이원론적 혼합주의였어. 선하신 하나님이 어떻게 악한 물질세계를 창조할 수 있느냐고 하는 입장을 취하면서 구약성경을 부인하게 되었고. 그러다보니 마르키온이라는 사람이 등장하게 되었지. 또 영지주의는 예수님께서 악한 육체를 갖는 성육신이 불가능하다고 보면서 예수님이 사람처럼 보일 뿐이라는 ‘가현설’을 주장했던 이단성 있는 사상이었어.

“그러면 교수님! 이 글에서는 두 번째 글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러면 사도신경에 관해 첫 번째 관심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해 알려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앞자리에 앉은 자매가 묻자 교수님은 요셉 씨에게 눈짓을 하면서 첫번째도 읽어달라고 신호를 보낸다. 그러자 요셉 씨는 첫번째 질문을 찾아 읽는다.

“‘사도신경’이 만들어진 정확한 일자를 어느 누구도 알 수 없단다. 4세기 말 전에 ‘사도신경’이 사용되지 않았지. 그것의 분명한 이유는 앞서 말한 325년 니케아 범교회 종교회의에서 지금의 ‘사도신경’을 따라 신조를 작성하지 않은 것을 보아 알 수 있지.

그런데 ‘사도신경’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기록상으로 볼 때, 약 380년경에 밀라노 감독 암브로스(339~397)가 로마감독 시리키우스에게 보내는 서신이었단다. ‘사제들의 가르침을 접하기 어렵다면… 로마교회가 항상 보존하고 있는 사도신경을 접할 수 있을 것이라’고 그는 말했단다. 암브로스라는 분은 어거스틴의 스승이었지.”

“약 15년 후, 그러니까 거의 4세기 말에 이르러 루피누스(410년 사망)라는 사람은 ‘사도신경’을 해설하면서 ‘사도신경’이 오순절 이후 사도들에게 기인한 것이라고 언급했어. 하지만 루피누스의 설명에는 많은 의혹이 있지. 그래서 15세기 말 종교개혁이 일어나기 전 활약했던 박식한 저자 로렌티우스 발라(1406~1457)는 사도신경이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라고 로마 가톨릭을 향하여 공격하기도 했단다.

‘사도신경’의 기원이 불명확하다고 해서 그 내용마저 사도적이지 않다거나 신약성경과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코 아니란다. 사도들의 작품이 아니기에 ‘사도신경’을 거부해서 안되는 것은 그것이 사도성을 지니고 있고 성경적 교리를 정확하게 요약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그러면 교수님! 초대교회 성도들의 믿음의 형식이 사도신경이었다는 것이죠. 12명의 사도들이 직접 쓴 것이 아니죠?” “그럼, 그렇지요! 그리고 사도신경의 핵심은 우리가 지금 배우고자 하는 ‘삼위일체’라는 내용이지요.”

1.1.1.1. 위증서

▲로렌티우스 발라의 모습
“교수님. 질문이 하나 더 있는데요. ‘로렌티우스 발라’는 누구인가요?” “음. 좋은 질문입니다. 발라(1406~1457)는 이태리 인문주의자, 수사학자, 법률가, 그리고 교육가였습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에도 능통했습니다. 1431년 사제가 되어 로마에 있는 사도적 비서직을 맡았고 여기저기서 수사학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면서 알폰소의 개인 비서가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가 교회에서 그릇되게 가르치는 몇가지 잘못들을 지적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오늘 우리가 읽었던 사도신경이 12사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때부터 발라는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1439년 ‘콘스탄틴 위증서’라는 글을 썼습니다. ‘콘스탄틴 기증서’가 교황청의 권력을 지지하기 위해 위조된 문서임을 밝혀낸 것입니다. 이 문서가 로마제국 시기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후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교수님, 그러면 발라가 로마 가톨릭인들이 주장하는 교황청의 권력의 근거가 되는 ‘콘스탄틴 기증서’를 거짓이라고 밝혔다고 하셨는데 무엇을 근거로 하여 그렇게 밝힐 수 있었습니까?”

“‘콘스탄틴 기증서’는 어디서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기원이 애매모호합니다. 어두운 중세 어느 시대에 만들어졌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9세기 경 위조 칙령집 안에서 발견하였습니다. 이 문서는 황제 콘스탄틴이 이태리 지배권을 문둥병에서 나음에 감사해 교황 실베스터에서 이양했따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잘못이라는 것이죠. 우리는 로렌조 발라가 쓴 ‘근거없이 주장된 콘스탄틴 기증서의 위증에 대한 소고’를 번역한 코올만(Christopher B. Coleman)의 서문을 보도록 합시다.”

기증서는 8세기 중엽에 쓰인 것으로 허위 이시도리안 칙령집(847~853)에 들어있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것의 어느 부분들은 교회법, 안셀름의 작품, 두스데디트의 작품, 그리고 그라티안 작품(교회법)에 들어 있기도 하다.

그 목적은 콘스탄틴 대제가 로마감독 실베스터(314~336)의 손으로 세례를 받고 문둥병에서 나음을 받은 후 다른 네 곳의 대주교 지역들에 대한 지상권과 모든 성직자들의 머리로서 특권을 로마감독이 갖고 있음을 확증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후 그에게 라테란 궁을 비롯한 세상의 여러 부분들의 소유권을 이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마 성직자는 모든 특권을 가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특권을 실베스터만 아니라 그의 후계자들에게도 준다는 것이다. 실베스터에게 로마, 모든 이태리 지역, 그리고 서방 지역을 영원토록 로마청의 권한 하에 둔다고 콘스탄틴은 맹세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상의 황제는 교회권에 종속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 발라보다 수년 전에 니콜라스 쿠사누스는 이것이 위조된 것임을 비판했다. 하지만 발라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문학적인 형태를 갖추어 비판했다.


“이어서 코올만은 27~29페이지에 이르러 5가지로 그것이 위증서임을 증명합니다.”

“간략히 말하면, ‘첫째, 콘스탄틴과 로마감독 실베스터가 그런 권한을 줄 수 없었고, 받지도 않았다. 둘째, 그런 권한을 콘스탄틴이 소유하지도 않았다. 셋째, 콘스탄틴은 로마감독 실베스터에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다. 넷째, 그래서 기증서란 있을 수 없다. 다섯째, 지금까지 소유한 교황권은 인위적으로 조작된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듣노라면 역사를 이렇게까지 왜곡시켜 사람들을 속였다고 생각하니 분통이 일어날 것입니다. 지금도 이러한 일은 빈번히 일어날 수 있습니다. 정말 역사를 배워야하는 중요성을 다시금 느껴봅니다. 우리의 주제에서 많이 벗어났는데 되돌아가도록 할까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