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독일이 낳은 현대 신학자 가운데 본회퍼(D. Bonhoeffer), 바르트(K. Barth), 몰트만(J. Moltmannn), 판넨베르크(W. Pannerberg) 등은 한국에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헬무트 틸리케(H. Thielicke)는 아직 낯선 사상가이다. 그는 독일 하이델베르크, 튀빙겐, 함부르크대학에서 신학교수로 활동했다. 나치 시대에는 히틀러에 저항함으로써 행동하는 신앙과 양심을 보여준 신학자였다. 그의 저서들 대부분이 영어로 번역되어 있다. 영미권에서는 아주 잘 알려진 친숙한 사상가이다. 특히 설교가로서의 틸리케는 쉽고 평이한 설교집과 수상집을 펴내었다. 그럼으로써 현대의 지성인과 기독교인들에게 알려진 대중적 사상가의 일면도 가지고 있다.


필자가 틸리케의 신학사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그가 독일권에서 성경적이고 복음적 기독교 사상을 변호한 데 있다. 그는 당시 20세기 중후반기에 풍미하던 바르트의 보편기독론적 신학, 불트만의 실존론적 신학, 틸리히의 존재론적 신학을 비판하였다. 틸리케는 기독교의 전통 교리를 한편으로는 그대로 수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현대의 상황과 관련지었다. 그러면서 그만의 독특한 복음주의 교의학과 복음주의 윤리학으로 체계화하였다. 그는 루터교적 전통에 서 있었으면서도 현실과의 대결과 문제 상황의 분석에 있어서는 개혁신학적인 사고의 틀에서 해결하려 했다. 또한 틸리케는 당시 주요 신학자들이 놓쳤던 것을 되살리기도 했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그는 바르트 신학이 도외시하는 창조세계의 독자적 질서를 강조한다. 그는 불트만 신학이 도외시하는 나사렛 예수의 계시의 역사적 사실성을 강조한다. 틸리히 신학이 간과하는 케리그마(kerygma)의 텍스트 중심성을 강조한다.

틸리케는 대학시절에 호흡장애의 갑상선 종양(Schilddrüsenschwellung, Kropf)이라는 질병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겪었다. 이를 통해 그는 ‘피조물적 불안’과 죽음이 감지되는 급박한 순간을 체험하였다. 틸리케는 반신경위축의 용도로 사용하는 소량의 약병이 자기를 도와줄 것인지, 아니면 독(毒)이 자기를 죽일 것인지를 결정하는 ‘결단의 밤’을 맞이하게 되었다. 바로 이때 병상 침대에 마주 서 있던 십자가에 달린 주를 만나는 체험을 하였다. 틸리케는 자기를 만지는 손을 느꼈고 구원을 받았다는 느낌과 행복한 능력의 흐름이 자신의 온 몸으로 흐르는 것을 체험했다. 이 기적적인 사건을 통해 1933년의 성금요일에 그는 병상에서 일어났다. 이 사건은 틸리케의 신학을 교회 정위적이며 신앙 우위적으로 바꾸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오랜 질병에서 오는 강직 경련의 고통 속에서 그는 인간 이성과 실존과 윤리의 한계상황을 경험하였다. 이러한 실존적 한계상황의 진지한 체험은 그로 하여금 독일의 강단 신학과 결별하고 복음적 신학을 하도록 이끌었다. 게다가 그는 질병에서 오는 죽음에 이르는 고통과 인간의 한계를 신앙적으로 극복하고 기적적인 치유를 체험하였다. 그럼으로써 그의 신학은 강의실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 실존의 고통과 영성에 관련된 성령론적 신학으로 전개되었다. 오랜 기간의 질병의 고통과 초자연적인 치유의 경험은 그의 신학이 교회의 경건에 지성적 반성의 도움을 주는 긍정적이고 생산적인 것이 되도록 하였다. 바르트나 불트만이나 틸리히의 신학과는 다른 매우 종교개혁적이며, 신앙전통 정위적으로 나아갔다.

틸리케는 나치주의를 비판한 ‘역사와 실존’으로 인해 하이델베르크대학 교수직에서 면직당하고 라벤스부르크(Ravensburg) 목사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차 세계대전 내내 그의 지성은 나치에 비판을 가하고 행동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이 시대를 향하여 하나님의 심판과 은총의 예언적 메시지를 선포하였다. 이 점에 있어 틸리케 신학의 윤리성과 현실 적응력은 크게 평가받는다. 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대적 비극을 경험한 틸리케는 이론적 질문보다는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한다. 전쟁, 폭력, 기근, 병과 죽음이라는 실제적이고 냉혹한 현실의 경험 속에서 생의 궁극적인 대답을 요구하였다.

그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튀빙겐대학과 함부르크대학의 총장으로 활동한다. 그는 대학의 정신적 이념을 신학적으로 제시했을 뿐 아니라 대학의 행정가로서도 크게 기여한 교육자였다. 틸리케는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의 매체에서도 설교활동을 하였다. 그리고 함부르크의 성 미카엘 교회에서 여러 인종과 계층들을 대상으로 목회를 하기도 했다. 또한 세계 각지에서 강연과 설교를 통하여 신앙의 질문과 지식, 윤리적 질문과 통찰을 현대인들에게 제시했다.

개인적으로는 질병에 시달리고, 시대적으로는 불우한 때를 경험한 틸리케는 다음과 같은 신정론(theodicy)의 질문을 제기한다. “왜 하나님은 악과 불의가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가?” “왜 우리의 삶은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의미없는 비극과 잔인성과 허무성을 동반하고 있는가?” 틸리케는 재난과 악이 하나님의 섭리에 기여한다는 생각을 통해서 이러한 질문이 가져오는 치명적인 상처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그 자신이 20세기 전후반에 있었던 사회적 긴장과 전쟁의 폐허 속에서 맹목적으로 자연과 세계를 읽지 않고 심판과 은총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직관했다. 고난에 대한 바른 질문 속에서 틸리케는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심오한 섭리와 목적에 참여하는 해방을 경험한 것이다.

그는 하이데거(M. Heidegger)의 존재의 질문과는 달리 인간의 존재를 “진리 안에 있다(in der Wahrheit sein)”라는 요한복음의 말씀에 근거한다. 그는 인간의 존재는 ‘진리 안의 존재(Das Sein in der Wahrheit)’라고 해석한다. 그럼으로써 그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지배하던 독일의 지성계를 향하여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존재에 관하여 역설하였다. 폴 틸리히도 존재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사상에 직면하여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존재는 인격적인 신이기보다는 존재의 신에 가깝다. 이러한 의미에서 틸리케는 하이데거의 존재의 진리가 지배하던 서구의 지성적 상황 속에서 복음의 진리의 입장에서 ‘존재의 진리’에 대한 바른 해석을 한 자이다. (계속)

김영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장

서울대 철학과
독일 마르부르크대 대학원 신학박사과정
독일 하이델베르크대(Dr. phil. & Dr. theol.)

영국 케임브리지대 신학부 연구교수
미국 예일대 신학부 연구교수
숭실대 한국기독교문화연구소 소장
한국개혁신학회 회장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현재)
숭실대 기독교학 대학원장(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