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신대 역사신학 라은성 교수(eunra.com)

1.1.1. 영지주의 발전과 영향


“지금까지 살펴본 영지주의는 기독교 변증가들에 의해 역사 속에 사라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후에 마니교나 뉴에이지 운동과 같은 사상에 영향을 주어 끊임없이 우리에게 스며들고 있습니다.”

1.1.1.1. 마니교

“3세기에 등장한 ‘마니교’(Manichaenism)는 불교, 기독교, 유대교, 그리고 이슬람교를 혼합하여 만든 것입니다. 지금은 사라진 것이지만 초대교회 때에 그 종교를 추종하는 자들은 시리아, 북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 그리고 페르시아 등지로 퍼져나갔습니다. 마니교에 관해 우리가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북아프리카에서 그것에 영향을 받은 어거스틴 때문입니다.”

“마니교는 그것을 만든 ‘마니’(약 216~276)라는 사람의 이름에서 비롯됩니다. 마니교는 정경의 종교입니다. 그가 쓴 파편적인 작품만이 현존합니다. 마니교는 선악 간에, 그리고 빛의 세상과 어두움의 세상 간에 전쟁터가 있다는 강력한 이원론적 종교입니다. 선이 궁극적으로 확산되면 결국 전쟁은 종결된다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마니교에서의 인간성에 대한 개념도 이원론적입니다. 우주에 있는 빛에 속한 영과 빛의 다른 실체들은 선한 세상에 속합니다. 하지만 물질에 갇혀 있습니다. 자신이 지닌 빛에 속한 영을 깨닫는 것은 곧 그 영이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어떻습니까? 영지주의 구원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마니교도들은 선택자들과 평신도들로 구분합니다. 선택자들은 엄격한 독신주의, 엄격한 채식주의, 청빈, 그리고 복음 전도와 같은 종교적 규율들을 보다 잘 준수하는 자들입니다. 이에 반해 평신도들은 선택자들을 섬기는 자들입니다. 만일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에 있다면 그것을 가리켜 ‘교권제도’라 부릅니다. 이러한 교권제도가 한국교회, 아니 우리 교회에 없는지 살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성경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언제든 그만둬야 할 것이며 잘된 것이 있으면 항상 본받아 준행해야 할 것입니다.”

1.1.1.2. 뉴 에이지 운동

“영지주의는 많은 현대 사상가, 철학자, 저자, 예술가, 그리고 학자들에게 팽배해 있습니다. 그 예로 프란체스코 파트리치(Francesco Patrizi), 윌리엄 브랙(William Blake), 20세기 독일 작곡가 칼하인 스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 그리고 심리학자 칼 융(C. F. Jung)을 들 수 있습니다. 영지주의와 칼 융에 관한 관계를 알기 위해 『조직신학 연구』에 발표된 ‘한국교회 영성신학 비판: 관상신학을 중심으로’를 잠시 인용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에서 인기리에 행해지는 ‘관상신학’이 영지주의 영향을 받았으며 심지어 영성신학자로 잘 알려진 헨리 나우웬 등도 영지주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설명합니다. 길게 인용합니다.”

두말할 필요 없이 융은 신영지주의와 뉴에이지 운동의 아버지이다. 그 이유에 대하여 그는 말하기를, “교회 내부나 외부에서 영지주의의 가장 능력있는 현대 형식들 중 하나는 융의 심리학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다”라고 했다. 융에 의하면, “자신이 악의 문제를 가장 효과적으로 다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면에서 사도적 전통을 잇는 후예로서 심오한 심리학을 밝혔다”고 하며 “고대에 영지주의자들의 주장들은 심리학적 경험에 의해 많은 영향을 받았고, 교회 교부들보다 폭넓은 기초 위에서 악의 문제와 맞붙어 싸웠다”고 주장했다.

1929년 융은 Secret of the Golden Flower에 대한 주석을 쓰면서 “중국 요가와 관련 있는 도교 본문만 아니라 연단술 소논문을 썼다”고 했다. 또 “Golden Flower의 본문은 나에게 올바른 길을 걷도록 했다. 중세 연금술에서 우리는 영지(영지주의)와 현대인들을 조명할 수 있는 종합적 무의식 과정 간의 기나긴 관계성을 가지게 된다”고 했다.

영성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뉴에이지 운동은 영지주의를 기반하고 있다. 영지주의에서는 물질에 묻혀 있는 영혼의 구원을 위해 신비한 영적 진리가 필요하며, 창조는 신격으로부터 발산되거나 이온들(aeons)로부터 발산된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러한 모습을 뉴에이지 운동에서도 볼 수 있다. 또 뉴에이지 운동은 펠라기안과 흡사하다. 펠라기안들은 인류가 본질적으로 선하며, 인간에게 요구되는 것은 거룩함이고 그것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한다.

로마 가톨릭 신학은 겉으로는 펠라기안을 반대한다고 표명하지만 실제상으로는 펠라기안이다. 이 문제는 기독교 영성의 근본적인 문제이며 로마 가톨릭 영성신학과 프로테스탄트 영성운동을 분리시키는 크나큰 문제가 되기도 한다. 죄에 대한 인식은 영성신학을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은 죄가 의지에서 발견되고 죄는 행동 자체에서 발견된다고 한다. 현재에 와서도 그들의 죄관이 조금 변했다고 하지만 여전히 ‘근본적인 선택’(fundamental option)이라는 기본 입장은 변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수덕신학이 가능한 것이다.

더욱이 이것은 뉴에이지 영성에서 가르치는 것과 동일하다. 더욱이 뉴에이지 운동과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기독교적 답변의 본질적인 것은 영과 물질, 영혼과 몸, 정신과 본체 간의 존재론적 관계를 인식하는 전통적인 우주관을 회복하는 것, 즉 헬라 교부들과 동방 정교 신학에서 볼 수 있는 고대적 기독교 정신에서 답변을 찾는 것이다. 이 답변을 위해 켈틱 기독교로 되돌아가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켈틱 기독교인들은 보다 명상적이었고, 타인들, 자신들, 자연, 그리고 환경으로부터 듣는 훈련에 익숙했고 그리하여 하나님에 대한 것과 하나님에 반대하는 것이 무엇임을 발견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켈틱 영성신학은 펠라기안적이다. 만일 이러한 명상적 영성운동이 성경적 인간관을 가지고 있지 못하면, 즉 펠라기안 죄관을 갖고 있으면서 하나님의 은혜보다 자신의 선택이나 자신의 능력을 우선순위 한다면 곧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는 것이다. 사막의 교부들의 대표자들로 불리는 안토니(St. Anthony)와 파코미안들(Pachomians) 간에는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는데 특별히 영지주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주장은 많이 일어나고 있다.

현대에 등장한 영성신학, 즉 수도원 운동에 영향을 받고 있는 영성신학은 영지주의적 경향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점에 관해 신비주의자 칼 융과 동양철학이 그 바탕을 깔고 있고 그 위에 진행되고 있는 것이 이 관상신학인 것이다. 작금에 유행하고 있는 현대 한국교회에서의 영성신학, 특별히 관상신학에 잘 반영되고 있다.


“고대 영지주의가 실제로 사라졌다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현재에 영지주의 영향은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로 하여금 행하게 하고 있습니다. 마치 7가지 비유에서 밤에 원수가 가라지를 심고 간 것처럼 말입니다.”

“위의 인용에서도 설명하듯이 뉴에이지 운동과 영지주의 간의 관계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며 최근 1945년 이집트 나일강 상류에서 ‘나그 함마디’ 문서가 발견되면서 영지주의 영향은 해를 거듭할수록 우리 삶에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더욱이 ‘다빈치 코드’라는 소설과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우리 사상 속에 반기독교적인 마음을 갖게 하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