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중세의 특징들 중의 하나가 수도원 제도의 형성과 발전이라고 지적했다. 수도원 제도의 지고선은 ‘하나님을 닮고 보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가난’과 ‘순결’과 ‘복종’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중세 수도원 제도를 신학적으로 비판할 수도 있으나, 손봉호 교수가 지적한 대로, 그것이 현대의 자유분방한 세속주의적 값싼 은혜의 기독교보다는 훨씬 낫다고 하겠다.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원이 프랜시스칸 수도원인데 그 운동의 창시자가 성 프랜시스였다. 성 프랜시스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미쳤는데 한경직 목사, 손양원 목사, 강원용 목사, 이동휘 목사, 이중표 목사 등에게 깊은 감동과 감화를 끼쳤다.


“첫째, 프랜시스는 버림과 청빈과 약함의 삶을 살았다.”

프랜시스(Francis)는 1182년 2월 이태리 앗씨시의 부유한 포목상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재산도 평안한 삶도 세상의 향락도 아버지로부터의 상속권도 아버지도 모두 버린 채 한평생 가난과 청빈의 삶을 살았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 한마디 한마디를 글자 그대로 실천하며 살려고 했다. 프랜시스는 두 벌 옷을 가지지 않고 신을 신지 않고 맨발로 걸어 다니며 살았다. 프랜시스는 자기는 가난이라는 이름의 여인과 결혼했다고 선언하며 절대 청빈과 완전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그는 심지어 지식과 학문도 버렸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오늘날 지식과 학문을 탐구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나도 한때는 책을 모아보고 싶은 유혹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명심하여 들으십시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 때문에 스스로 무식하게 되는 사람이 진정 행복합니다.” 한경직 목사가 박사와 교수되는 것을 포기하고 신학교 3년 과정만 공부하고 귀국하여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신의주로 돌아와서 목회하게 된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동휘 목사가 “불편하게 삽시다”를 교회의 표어로 정한 것도 프랜시스의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둘째, 프랜시스는 동정과 사랑과 착함의 삶을 살았다.”

프랜시스는 가난하고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을 찾아가서 그들을 동정하고 품고 사랑하며 살았다. 그에게 있어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은 마땅히 섬겨야 할 주인이었고 특히 문둥병자나 버림받은 사람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대리하는 자들이었다. 그는 문둥병자 수용소를 찾아가서 그들의 손에 일일이 입을 맞추며 그들을 품었다. 그의 사랑은 산적같은 흉악한 자들에게도, 이슬람 교도들에게도 아니 이단들에게도 미쳤고 사나운 이리에게도 모든 동물들과 식물들에게도 아니 해와 달과 별들에게도 미쳤다. 그의 생애와 사역에는 많은 기적이 나타났고 귀신이 쫓겨가고 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나 그는 한번도 기적을 그의 전도의 방편으로 생각하지도 않았고 기적을 이용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사랑만이 그의 삶의 방식이었고 전도의 방식이었다.

굽비오라는 마을에 사람과 가축을 해치는 사나운 늑대 한 마리가 밤마다 내려와서 사람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곤 했다. 프랜시스는 늑대를 찾아갔다. 늑대에게 다가가서 부드러운 눈으로 조용히 늑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늑대 형제여!” 너무나 부드럽고 다정한 목소리였다. 그런 다음 늑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프랜시스의 눈길과 늑대의 눈길이 마주쳤다. 드디어 프랜시스는 몸을 구푸리고 늑대의 목을 껴안았다. 그러자 늑대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프랜시스의 사랑은 모든 사람들은 물론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미쳤다. 프랜시스는 온갖 짐승들과 새들을 향해 형제 자매라고 불렀고 해와 달과 별들까지도 형제와 자매라고 부르며 그들을 향해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설교했다.

“셋째, 프랜시스는 가난과 고통까지도 사랑하는 주변 지향적 삶을 살았다.”

그는 우주와 모든 것을 사랑했는데 고통과 죽음까지도 사랑했다. “비애는 나의 자매이고 고통과 죽음도 나의 자매입니다.” 그는 가난과 고통을 사랑하는데 그치지 않았고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었다. 가난하게 살았고 고통스럽게 살았다.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주님처럼 주변 지향적 삶을 문자 그대로 살고 싶었다. “우리는 가난을 옷으로 삼고 고난을 양식으로 삼아야겠습니다.” 물론 그가 고행 자체를 예찬한 것은 아니었다. 사랑이 궁극적인 동기와 목적이었다. “꼭 필요한 것은 고행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프랜시스가 가난과 고통을 사랑한 근본적인 이유는 주님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고 주변의 가난한 사람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의 삶은 주님 사랑에 깊이 빠진 삶이었고 주님과의 깊은 기도에 빠진 삶이었다. 그가 죽기 2년 전 라베르나 산에 들어가 깊은 기도에 빠졌다. 그는 이렇게 기도했다. “사랑하는 주님, 도대체 당신은 누구이시오며 작은 벌레같은 저는 무엇입니까? 오, 내 주 예수 그리스도시여, 제가 죽기 전에 두가지 은총을 허락해 주소서. 한가지는 당신께서 수난에서 당하셨던 그 고통을 제 영혼과 육체도 체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옵소서. 또 한가지는 그 어떤 고통도 사랑으로 감내할 수 있는 극치의 사랑을 제게도 넘치게 주시옵소서.” 바로 그때였다. 프랜시스의 몸에는 마치 불덩어리를 댄 것 같은 고통이 일어나 그는 그만 까무러쳐 버리고 말았다. 그의 두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에 심한 통증이 일어났다. 상처가 생겼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는 그 이후 죽기까지 극심한 몸과 영혼의 고통을 지니며 살다가 고통스럽게 죽었다. 그러나 그의 영혼은 무한한 기쁨을 누렸다.

그는 1226년 10월 3일 4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 주님 품으로 옮겨졌다. 그는 주님이 벌거벗은 몸으로 죽으셨던 것처럼 자기도 벌거벗은 몸으로 죽고 싶다고 말했다. 형제들이 옷들을 모두 벗겨내고 그를 맨 땅 위에 뉘었다. 그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애원합니다. 당신은 나의 피난처, 나의 모든 것, 이 부르짖는 소리를 들어주소서. 나에게 입혀주신 당신의 성총으로 이 몸이 의인들에게 둘러 싸이리이다.” 그리고 둘러 서 있는 형제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기 서 있는 형제들과 여기 없는 형제들의 죄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에게 진정으로 하나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그는 다음과 같은 마지막 말을 하고서 눈을 감았다. “오, 나의 자매 죽음이여.” 프랜시스는 주님과 가난과 고통을 너무 사랑하다가 가난과 고통 자체가 되면서 살다가 그렇게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