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5세기 이후 영국과 유럽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과 운동은 웨일즈 지방 출신인 패트릭과 그가 일으킨 켈틱(Celtic) 선교 운동이었다. 켈틱 선교 운동은 패트릭을 통해 아일랜드를 복음화시켰고, 콜럼바를 통해 스코틀랜드를 복음화시켰으며, 아이단을 통해 노덤브리아와 영국 전역을 복음화시켰다.


“노덤브리아의 선교사 아이단”

영국 동부에 위치한 노덤브리아(Northumbria) 왕국(앵글로 색슨족으로 구성된)에 처음 기독교가 소개된 것은 625년 에드윈(Edwin)왕이 영국 동남부 켄트(Kent)왕국의 공주 에델버가(Ethelberga)를 왕비로 맞아들인 때였다. 에델버가는 노덤브리아에 와서 그곳에 로마 기독교를 소개했다. 한편 에드윈 왕이 그 세력을 웨일즈(Wales)로 확장해 나가던 중 웨일즈의 왕 카드월론(Cadwallon)에 의해 크게 패했다. 카드월론 왕이 노덤브리아를 침공하니 왕국은 분열되고 왕자들은 서부 아길쉬어 지역의 달리아다 왕국으로 피신했다. 이때 왕자들(에안푸리드와 오스왈드)이 스콧트 족들과 함께 지내며 콜럼바 수도원의 감화를 받아 그 곳에서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정세가 유리하게 되어 에안푸리드 왕자가 노덤브리아로 돌아가 왕위에 올랐고 다시 오스왈드(Oswald) 왕자가 그를 계승하여 즉위했는데 그는 곧 카드월론을 패배시켰다. 카드월론과의 전쟁 중 오스왈드 왕자는 꿈 속에서 콜럼바가 그에게 승리를 약속하는 것을 보았다. 오스왈드는 십자가를 세우고 기도한 후 나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오스왈드는 전쟁으로 침체된 노덤브리아의 기독교 신앙을 부흥시키기 위해 아이오나(Iona) 섬으로 사람을 보내어 선교사를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아이오나에서 노덤브리아로 파송한 첫 선교사는 적절한 훈련을 받지 못했던 사람인 것 같다. 선교에 실패한 그는 아이오나로 돌아가서 “노덤브리아 사람들은 도무지 길 들일 수 없는 완고하고 야만적인 사람들”이서 가르침을 받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이에 대하여 아이오나 수도원에 있던 아이단(Aidan)은 노덤브리아 선교의 실패는 그들 때문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선교사 자신의 잘못’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선교사는 모름지기 노덤브리아 사람들의 무지를 이해하고 그들에게 알맞은 선교를 하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아이오나 수도원은 아이단을 적임자로 인정하여 그를 노덤브리아의 감독으로 임명한 후 635년 노덤브리아로 파송했다. 오스왈드는 그를 환영하여 동해안의 조그만 섬 린디스판(Lindisfarne) 을 주어 선교 활동의 중심지로 삼게 했다. 썰물 때는 걸어서도 해안에 상륙할 수 있었던 해안 가까운 곳에 있는 섬이었다.

아이단은 린디스판과 노덤브리아 사이를 수없이 왕래하여 ‘걸어다니며’(peregrini) 노덤브리아 선교에 종사했다. 아이단이 소유했던 인자한 성품과 엄격한 신앙 생활의 모범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었고 그의 선교는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깊은 관심을 표했으며 노예들을 구속해 주고 그들을 교육시키는 일에도 종사했다. 그 결과, 노덤브리아 사람들이 길들일 수 없고 가르침을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아니었음이 드러났다. 그들은 함께 모여 아이단의 설교 듣기를 즐겼다. 한편 아이단의 선교가 크게 성과를 거두게 된 이면에는 오스왈드 왕의 협조가 있었다. 오스왈드 왕 자신이 때로 아이단의 스코트 말 설교를 앵글로색슨 말로 통역하기도 했다고 베다가 기록했다.

복음이 점점 노덤브리아 지역에 널리 퍼지게 되어 아이단은 아이오나와 아일랜드에까지 선교사 파송을 더 요청했다. 많은 선교사들이 아이단에게 협력하게 되었고 린디스판은 더욱 크게 발전하여 제 2의 아이오나로서 선교사 훈련과 파송의 과업을 수행해 나갔다. 아이단은 린디스판에서 엄격한 생활, 학문 연구 그리고 선교사 훈련에 종사하다가 651년 그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린디스판은 노덤브리아 복음화뿐 아니라 영국 복음화에도 크게 공헌했다.

에섹쓰(Essex)(영국 동남부 지역)는 본래 로마 선교사에 의해 복음을 받았으나 참된 의미에서 에섹쓰의 복음화는 역시 린디스판의 피난(Finan)(아이단의 후계자)에 의해 이루어졌다. 머시아(Mercia)(영국 중부 지역)의 복음화 역시 린디스판에 의해 추진되었다. 서섹쓰(Sussex)(영국 남부 지역)의 이교적 색슨족들을 개종시킨 데 크게 공헌한 윌프리드(Wilfrid) 감독(634-709)은 노덤브리아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났고 린디스판에서 훈련을 받은 사람이었다.

라토렛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영국의 복음화는 주로 두 곳으로부터 기원했다고 할 수 있다. 첫째로 로마요, 둘째는 아이오나에서 비롯했다. 아이오나에 의해서 노덤브리아의 개종이 완성되었고 에섹쓰가 기독교 신앙을 완전히 받아들이게 되었고 중부 영국이 복음의 감화를 입게 되었고 마지막 남았던 이교적인 앵글로색슨족(서쌕스와 위트섬에 거주하던)이 기독교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 두 기원 즉 로마와 아이오나 중 후자가 영국 복음화에 더 큰 공헌을 했다고 하겠다. 실로 로마 선교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었다고 가정할지라도 영국민의 개종은 아마 스콧틀랜드와 아일랜드에서 온 켈틱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Latourette, Thousand Years, p.72).

“유럽의 선교사들”

영국을 복음화시킨 켈틱 기독교의 여력은 이제 바다를 건너 유럽 대륙에 까지 퍼져가게 되었다. 패트릭 자신이 유럽 대륙에서 신앙의 훈련을 받았으나 세월이 흐름에 따라 유럽 교회는 신앙이 침체되어 선교열에 불붙던 젊은 켈틱교회의 도움이 필요하게 되었다. 아일랜드 태생으로 방고(Bangor)수도원에서 훈련을 받은 콜롬반(Columban)(550-615)은 590년경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바다를 건너 가울로 가서 선교에 종사했다. 콜롬반과 함께 가울에 왔던 12명 동료 중의 한 사람인 갈(Gall)(550-645)은 스위스에 가서 그곳에서 켈틱 기독교를 전했다. 서섹쓰의 색슨족들에게 선교했던 윌프리드 감독(634-709)은 프리지안(Frisians)족 (지금의 화란과 벨기에)에게 복음을 전한 최초의 영국 해외 선교사가 되었다. 노덤브리아의 태생으로 아일랜드의 한 수도원에서 12년간 훈련을 받은 윌프리드 감독의 제자 월리브로드(Willibrord)(658-739)는 690년경 12명의 동료들과 함께 프리지안을 찾아가 일생을 “프리지안의 사도”로 선교에 헌신했다. “독일의 사도”로 불려지는 보니페이스(Boniface)(680-754)는 가울 복음화에 일생을 바친 “유럽 역사에 가장 깊은 영향을 미친 영국 사람” 이었고 “기독교 확장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선교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