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5세기 이후 영국과 유럽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과 운동이 있었다. 그 사람은 영국 서해안 즉 웨일즈 지방 출신인 패트릭(Patrick)이었고 그 운동은 그가 일으킨 켈틱(Celtic) 선교 운동이었다. 켈틱 선교 운동은 아일랜드를 복음화시키고 스코틀랜드와 영국 전역을 복음화 시켰으며 다시 유럽 대륙에까지 복음화의 불길을 퍼지게 한 선교 운동이었다.


“스코틀랜드의 사도 콜럼바”

라토렛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7세기 서유럽 선교의 추진력을 제공했던 선교의 중심지는 유럽에서 떨어져 있던 아일랜드 섬이었다.” 그가 계속하여 서술하는 대로 6세기경 이미 “활기에 넘쳐 있던 [아일랜드의] 수도원들을 중심으로 기독교 켈틱 문화가 발전하고 있었는데… 이곳으로부터 아일랜드의 수도승들 선교사들 그리고 학자들이 [세계 각처로] 퍼져 나갔다.”(Thousand Years, pp. 36,38) 그리스도를 위하여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하던 아일랜드 사람들을 “페레그리니(peregrini)” ‘걸어 다니는 사람들’ 즉 ‘순례자들’이라고 불렀는데 많은 “페레그리니”가 영국으로 그리고 대륙으로 건너가 걸어 다니며 복음을 전했다.

콜럼바(Columba)는 이들 “순례자들”의 한 사람으로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일생을 바쳐 그 곳에서 복음을 전했다. 콜럼바의 생애와 그 연대에 대한 중요 사료는 그의 제자 아담난(Adamnan)이 기록한 「콜럼바의 전기」인데 전설들과 과장된 이야기들이 섞여 있어 확실한 역사적 사건을 가려내기가 힘들다.

콜럼바(c. 521-597)는 521년경 아일랜드의 서북부 도네갈(Donegal) 주에서 귀족의 가문에서 출생했다. 귀족의 아들들을 수도원에 보내 훈련을 받게 하던 아일랜드의 습관에 따라 소년 콜럼바는 모빌(Moville)에 있는 수도원에 보냄을 받아 피니안(Finnian) 원장 밑에서 훈련을 받았다. 그는 후에 집사로 그리고 장로로 안수를 받았으며 아일랜드 곳곳으로 ‘순례’하며 여러 교회들과 수도원들을 세웠다.

콜럼바는 562년이나 563년경 그가 42세 되었을 때 선교적 열정으로 아일랜드를 떠나 스코틀랜드 서해안 아길쉬어(Argyllshire) 지역으로 갔다. 아담난은 전기 서문에서 콜럼바가 아일랜드를 떠나게 된 이유로 그저 단순히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고 기록했다. 콜럼바는 그의 동료 12명을 거느리고 스코틀랜드 서해안의 작은 섬 아이오나(Iona)에 상륙하여 정착하게 되었다. 콜럼바는 어렵지 않게 달리아다의 왕 코날(Conall)의 허락을 얻어 아이오나에 수도원을 세우고 그 곳에서 기도, 금식, 연구, 저술, 노동에 종사하며 그곳을 “선교 훈련 센터”로 이룩해 갔다.

콜럼바는 스코틀랜드 동북부의 인버네스(Inverness) 지역의 픽트(Picts)족에게 자유로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565년경 브루드(Brude) 왕을 찾아 인버네스로 갔다. 처음에는 브루드 왕과 그의 이교 승려들이 콜럼바를 받지 않으려 했으나 콜럼바가 승려들(druids)과 겨루어 이김으로 복음의 능력을 과시했고 결국 브루드 왕은 개종을 했다. 콜럼바는 브루드 왕의 환심을 사게 되었고 픽트족을 위한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콜럼바는 아이오나 섬으로부터 스코틀랜드의 여러 지역을 수 없이 왕래하며 특히 그람피안(Grampian) 산맥 북부 지역의 픽트(Picts)족 복음화를 위해 그의 여생 30여년을 바쳤다.

콜럼바는 자기를 적대하는 자를 저주하며 싸울만한 강인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동시에 불쌍한 사람들과 그리고 짐승들에게까지도 자비를 베풀었던 인자한 성품을 가졌던 사람이었다. (Latourette, Thousand Years, p.54). 브루스 교수가 지적하는 대로 초기의 오만하고 극렬했던 성격이 깊은 참회와 영적 변화의 과정을 거쳐 인자한 성품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추측할 수도 있다. (Bruce, The Spreading Flame, p.388) 콜럼바는 폭풍에 상처를 입은 학을 치료해준 일을 비롯하여 동물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었으므로 그가 쇠약해져서 쓰러져 있을 때 말이 찾아와 슬퍼했다고 아담난이 기록했다.(Vita Sancti Columbae, p. I, 35) 그의 인자한 성품 때문에 그를 비둘기(Colum)란 이름을 따서 콜럼바(Columba)라 불렀다고 한다.

콜럼바는 596년이나 597년경 아이오나 섬에서 “얼굴에 기쁨이 충만하여 거룩한 천사들이 그를 맞으러 오는 것을 보면서” 7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오나를 중심으로 한 콜럼바의 선교가 스코틀랜드 복음화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고 하겠다. 콜럼바는 “스코틀랜드의 사도”라고 불려질 만큼 스코틀랜드 복음화의 주역을 담당했다. 물론 당시에 콜럼바만이 스코틀랜드의 복음화에 종사한 것은 아니었다.

위돈(Withorn)의 ‘흰 집’(Candida Casa, White House)을 중심으로 한 니니안(Ninian)의 선교와 글라스고우(Glasgow)를 중심으로 한 켄티건(Kentigern)의 선교가 모두 스코틀랜드 복음화에 커다란 공헌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오나 선교가 6세기 스코틀랜드 복음화 운동에 “가장 깊은 영향을 끼쳤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라토렛 교수가 지적한 대로, “아이오나 센터의 감화는 스코트족(Scots)과 픽트족(Picts)에게 미쳤고 그리고 영국 동부의 이교적 튜톤족(Teutons) 앵글로색슨족(Anglo-Saxons)을 개종하는데까지 공헌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영국을 위한 아이오나의 선교 운동이 로마의 선교 운동보다 한 세대 후에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민 개종에 더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인정할 수 밖에 없다.”(Latourette, Thousand Years, p.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