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이기풍(李基豊, 1868-1942) 목사는 제주선교의 개척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08년 4월, “어두움과 죽음의 그늘에 앉아 있던” 땅 제주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그는 삼다도를 복음의 생명수가 넘치는 물댄 동산으로 가꾸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쏟았다. 그 결과 제주는 끝을 헤아릴 수 없던 깊은 어둠의 잠에서 깨어나 생명의 호흡을 토해내기 시작했다.


물론 제주선교가 처음부터 순조로웠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개척 선교현장이 그러하듯이 제주선교 또한 계속되는 시련에 직면해야 했다. 더구나 1899년의 신축교난의 여파로 기독교에 대한 제주 도민들의 편견은 가혹하기 그지없었다. 그 시련이 얼마나 컸었는지 이기풍 목사가 제주선교 포기를 생각할 정도였다. 어둠의 세력들의 무차별적인 공격으로 영육이 모두 약해진 그는 생각다 못해 마펫(S.A.Moffett) 선교사에게 평양으로 보내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그런데 답장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이기풍 목사의 편지를 잘 받았소이다. 그런데 당신이 내 턱을 때린 흉터가 아직 아물지 않고 있으니, 이 흉터가 아물 때까지 더욱 분투노력하시오.”

본래 이기풍은 평양의 악명 높은 난봉꾼으로 회심 이전의 사울과 같은 복음의 훼방꾼이었다. 평양에서 개척선교를 하던 마펫 선교사의 집안으로 돌을 던져 난장판을 만들어 놓기는 기본이었고, 심지어 길거리에서 전도하던 마펫 선교사에게 돌을 던져 그의 턱을 깨뜨리고 도망갔던 그였다. 하지만 예수님은 사울을 놓지 않았듯이 그러한 이기풍의 뒤를 사랑의 시선으로 추적하셨다. 그리고 청일전쟁의 위험을 피해 도망갔던 원산에서 이기풍의 전적인 항복을 이끌어 내셨다.

원산에서 사역하던 스왈른(W.L.Swallon) 선교사가 그 통로가 되었다. 이기풍이 하루는 밖에 나갔다가 스왈른 선교사가 “회개하고 예수를 믿으라”고 길거리에서 전도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지나쳤는가 싶었는데, 점차 평양에서 저질렀던 사건이 오버랩 되었다. 특히 돌팔매질로 서양선교사의 턱을 깨뜨렸던 일은 너무도 생생했다. 집에 돌아온 그는 지난 일에 골몰하다가 잠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방안이 환해지더니 머리에 가시관을 쓰신 분이 나타났다. 너무 눈이 부셔서 쳐다볼 수도 없는데, “기풍아! 기풍아! 왜 나를 핍박하느냐? 너는 나의 복음의 증인이 될 사람이다!”라는 음성이 들려왔다. 다메섹에서 사울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예수님이 꿈을 통해 ‘평양의 사울’이었던 그에게 보이신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그는 지난날을 통회자복하고 하나님께 완전히 항복하게 되었다.

마펫 선교사의 답장을 받는 순간 이기풍의 뇌리에는 지난날의 사건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자신의 영적 무장과 “우리가 가지 않으면 누가 그 불쌍한 영혼을 구원하겠어요!”라는 아내 윤함애 사모의 설득에 더욱 힘을 얻어 제주선교를 시작했지만, 그는 끝이 보이지 않는 시련과 영적 전쟁 속에서 그만 제주선교의 포기를 생각할 정도로 크게 낙심하던 차였다. 그러한 상황에서 도착한 마펫 선교사의 편지는 그로 하여금 정신이 번쩍 들게 했다. 이에 그는 하나님 앞에 엎드려 대성통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음과 나약함을 회개하고, 원초적 영성과 사명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후 제주선교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기풍 목사와 한 젊은 정신이상자의 만남이 극적인 계기가 되었다. 하루는 이기풍 목사가 한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그 청년은 거리를 활보하며 아무에게 행패를 부려 주민들을 불안에 떨게 하던 정신이상자였다. 집에서 못나가도록 쇠사슬로 묶어 매어두지만 소용이 없었다. 쇠사슬도 가볍게 풀고 나돌아 다녔다. 주민들은 그 청년에게 귀신이 붙어서 그렇다고 했다.

이기풍 목사는 청년을 집으로 데려간 후, 그가 행패를 부리거나 도망치지 못하도록 줄로 묶어 놓고 부인과 함께 열심히 십자가와 보혈 찬송을 부르며 기도했다. 청년은 기도하는 사이에 발악을 하다가 묶어 놓은 것을 풀고 도망가고는 했다. 그러면 이기풍 목사는 다시 잡아다가 앉혀 놓고 찬송하며 기도했다. 그러기를 며칠간 반복하는 사이에 이기풍 목사와 사모는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러나 이 청년이 온전해지느냐 온전해지지 않느냐에 따라 제주선교의 성패가 가름난다고 생각했기에 전적으로 하나님께 매달렸다.

그런데 하루는 청년이 몹시 얌전하게 굴었다. 다른 때 같으면 기를 쓰며 발악하다가 도망쳤을 텐데, 그날따라 엉거주춤하다가 풀이 죽어 주저앉는 것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마음에 짚이는 것이 있어 청년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까지는 묶어 놓은 것을 잘도 풀고 도망치더니, 왜 오늘은 풀이 죽어 꼼짝 못하지?” 그러자 청년이 “어제까지는 우리 대장이 묶어 놓은 것을 풀어 주었기 때문에 그랬지. 그런데 오늘은 우리대장이 풀어주지 못해”라고 기가 죽은 소리로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에 “그건 또 무슨 소리냐? 왜 대장이 풀어주지 못하느냐?”고 이기풍 목사가 물었다. 그러자 청년이 저기 대장이 보이지 않느냐는 듯이 손짓으로 담장을 가리키면서, “보세요. 저기 흰옷 입은 군사들이 창을 들고 이 집을 빙 둘러싸고 있지 않아요. 그러니까 우리 대장이 겁이 나서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 당신이 자꾸 노래하고 기도하니까 우리 대장이 더욱 힘을 못 쓰잖아요”라고 대꾸하는 것이었다.

이기풍 목사는 그 말에 더욱 용기를 얻었다. 그리고 부인과 함께 식음을 전폐하고 밤이 깊도록 찬송과 기도를 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청년이 입에서 흰 거품을 내뿜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잠시 후에 그만 푹 꼬꾸라져 깊은 잠에 떨어졌다. 그리고 다음날 늦게까지 푹 자고 일어나더니 “제가 왜 여기에 와있죠?”라고 의아해 했다. 이기풍 목사는 청년의 손을 힘껏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그간의 일을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예수를 믿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후 청년과 그 가족들은 모두 교회에 나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소문이 제주도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각종 병자들이 모여들고,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 1912년에는 8개 교회에 교인수가 4백여명에 이르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