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명섭 박사 (서울신대 성결교회역사연구소 전임연구위원)

김교신(金敎臣, 1901-1945)은 1920년에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후, 성서조선을 꿈꾸며 남은 일생을 불살랐다. 당시 사람들 중에는 ‘기독교의 역사적 전통을 이탈한 자’라는 차원에서 그를 ‘무교회주의자’로 공박하기도 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성서사랑과 민족사랑에 마음을 빼앗겼으며, 둘을 하나로 합금(合金)하고자 애썼던 자라고 할 수 있다.


김교신에게도 “학문에는 국경이 없다”라는 연설에 가슴이 떨릴 정도로 흥분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 그는 사해동포주의라는 꿈을 좇아 웅비의 나래를 준비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어느 날 자신에게 들려온 “아무리 발버둥쳐도 너는 조선인이다”라는 한마디에 화들짝 놀라 깨어났다. 사해동포주의의 허상을 깨닫고 진정으로 그가 사랑하고 부대끼며 보듬어야 할 자리가 민족임을 자각하게 된 것이다.

이제 그에게 “조선은 다시없는 조선”이며, ‘온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고 있는’ 애인(愛人)이었다. 그리고 성서야말로 이 애인에게 줄 가장 귀한 선물이었다. 성서는 ‘책 중의 책’이며 ‘가장 귀한 책’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게 ‘세상에 제일 좋은 것은 성서와 조선’이었다. 그래서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의 트레이드마크인 ‘성서와 조선(Bible and Korea), 성서를 조선에(Bible to the Korea), 조선을 성서 위에(Korea on the Bible)’라는 표어가 생겨나게 된 것이다.

김교신의 성서사랑은 1925년 내촌감삼(內村鑑三) 문하의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조선성서연구회>를 조직하고 헬라어 원문으로 신약성서를 연구하면서 비롯되었다. 당시 그와 함께 했던 동인은 함석헌,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이었다. 이 모임이 이후 「성서조선」 창간(1927/7)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김교신은 1930년 5월호부터 주필로 활동하며, 이후 12년 동안 「성서조선」에 자신의 삶을 걸고 출판해 나갔다. 그에게 「성서조선」은 ‘먹고 남은 것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출판하고 남은 것으로서 생활해야’ 하는 그런 것이었다. 「성서조선」은 그에게 ‘최대의 것이요,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계속되는 엄청난 출혈을 감수하면서도 일제에 의해 강제폐간 당할 때까지 그 일을 지속해 나갔던 것이다.

김교신이 이처럼 ‘성서를 민족에’ 주며 ‘민족을 성서 위에’ 세우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성서만이 민족의 진정한 골격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어떤 사람은 음악을 조선에 주며, 어떤 사람은 문학을 주며, 어떤 사람은 예술을 주어 조선에 꽃을 피우며 옷을 입히며 관을 씌울 것이나, 오직 우리는 조선에 성서를 주어 그 골격을 세우며 그 혈액을 만들고자 한다”고 그 사명을 천명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기독교에서도 어떤 이는 기도생활의 황홀의 경을 주창하며, 어떤 이는 영적 체험의 신비세계를 역설하며, 어떤 이는 신학지식의 조직적 체계를 애지중지하나, 우리는 오직 성서를 배워 성서를 조선에 주고자 한다. 더 좋은 것을 조선에 주려는 이는 주라. 우리는 다만 성서를 주고자 미력(微力)을 다하는 자이다”라고 그 신앙적 정체성을 당당하게 드러냈던 것이다. (1935/4)

당시 한반도는 신조선 건설의 취지를 내건 많은 운동들로 요동하고 있었다. ‘과학조선’운동, 덴마크식 ‘농업조선’운동, 신흥도시 중심의 ‘상공조선’운동, 그리고 사조(思潮)에 파도치는‘공산조선’ 운동 등등. 김교신은 이런 운동들의 유익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든 풀의 꽃과 같고 아침이슬 같으며, 오늘은 있었으나 내일에는 그 자취도 찾아볼 수 없을 것이며, 모래 위의 건축이라 비바람이 치면 무너지게 됨이 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보았다. 따라서 그는 성서적 진리를 이 백성에게 소유시키는 기초공사를 통해 ‘이러한 구형적(具形的) 조선 밑에 영원한 기반을 넣고자’ 했다. 즉 성서를 ‘조선혼’의 기반으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독자들을 향하여 “넓게,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고 일성(一聲)할 수 있었다.

그런데 김교신의 성서조선이란 조국의 미래를 염려하는 기독교정신이었고, 민족의 독립을 기원하는 소탈한 민족애였으며, 또 민족 해방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길이었다. 물론 그가 노골적으로 항일운동에 가담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삶과 가르침은 일제에 항거하는 자의 모습을 넉넉히 보여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가 끝까지 창씨개명을 거부한 것도, “만일 신사문제, 현실 총독정치를 성서로써 증명, 찬동하는 것 등을 강요당할 경우가 온다면” 죽음도 불사하겠다는 서신도, 그리고 ‘조와’(弔蛙: 개구리의 죽음을 슬퍼함)에서 혹한에 살아남은 두어마리 개구리를 보며 “아 전멸(全滅)은 면했구나!”라고 희망의 숨결을 내쉬었던 것도, 모두 일제에 대한 보이지 않는 항거였다.

이는 김교신이 ‘조선 위의 성서’라는 의미의 ‘조선적 기독교’를 거부하고, ‘성서 위의 조선’이라는 의미의 ‘조선산 기독교’라는 명칭을 사용했던 데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독교도 조선 김치 냄새나는 기독교’라는 그의 표현에서도 그런 정신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1935/1).

그래서 일제는 “성서조선의 일당이야말로 팔딱팔딱하며 결사나 꾸미는 민족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 이상으로 더욱 조선민족의 백년 아니 오백년 후를 계획하는 최악질들”이라고 단죄했던 것이다. 그리고 「성서조선」에 실린 권두언인 ‘조와’를 빌미삼아 1942년 3월호를 끝으로 강제폐간시켰던 것이다. 일제의 눈에 성서조선운동이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민족운동으로 비췄던 것이다. 그로 인해 김교신은 함석헌, 유달영 등 13명과 서대문 형무소에서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출옥 후 그 후유증으로 1945년 4월 25일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