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한국복음주의협의회 대표, 강변교회 담임)

5세기 이후 영국과 유럽 복음화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과 운동이 있었다. 그 사람은 영국 서해안 즉 웨일즈 지방 출신인 패트릭이었고 그 운동은 그가 일으킨 켈틱(Celtic) 선교 운동이었다. 켈틱 선교 운동은 아일랜드를 복음화시키고 스코틀랜드와 영국 전역을 복음화시켰으며 다시 유럽 대륙에까지 복음화의 불길을 퍼지게 한 선교 운동이었다.


“적응식 선교”

패트릭(Patrick)은 어디를 가든지 먼저 그 지방의 유지와 정치적 지도자를 설득하고 전도하여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힘쓴 것 같다. 패트릭은 아일랜드 동북부 미트(Meath)주에 머물면서 아일랜드 왕 로게어(Laoghaire)의 환심을 샀고 특히 그의 동생 코날(Conall)의 후원을 얻으며 미트(Meath)주 일대를 크게 복음화 시켰다.

코날은 패트릭에게 땅을 기증했고 패트릭은 그 곳에 60자 길이의 큰 교회를 세웠다. 패트릭은 아일랜드 전역에 걸쳐 수천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성직자들을 세워 안수도 했다. 패트릭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마치 사도 바울이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으로(고전9:22) ‘영혼을 위하여 재물과 자신까지 허비’했던 것처럼(고후12:15), 패트릭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했다.

“그들이 나를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 나는 너희를 위하여 재물을 허비했다. 때때로 나는 군주들(kings)에게 선물을 바치기도 했다. 더욱이 내가 사법관들(judges)에게 얼마나 많은 재물을 지불했는지 아는가?... 나는 지금도 허비하고 있고 앞으로도 더 많이 허비할 것이다. 내 자신까지 허비하도록 주님께서 나를 도우실 것이다.” (참회록, 50장).

패트릭은 아일랜드 교회가 유럽 대륙의 로마 기독교와 관련을 유지하기를 원했으면서도, 아일랜드 실정에 맞는 교회 조직을 이룩했고 아일랜드 풍습에 맞도록 교회 생활을 지도했다. 즉 유럽에서는 교회 조직이 도시의 감독을 중심으로 하는 감독구 단위로 되어 있는데 비해,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교회 조직을 부족을 중심으로 하는 수도원구 단위로 이룩했다. 아이랜드는 여러 개의 작은 주들로 조직되어 있었고 이 주들은 또한 여러 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부족장이 신앙을 고백할 때 일반적으로 부족 전부가 그의 신앙을 따르곤 했다. 그리고 부족은 대체로 수도원을 중심으로 신앙생활을 했으므로, 수도원은 아일랜드 교회 조직의 기본 단위가 되었다. 또한 처음에는 로마 교회에서 행해지던 원형 채발(coronal tonsure; 성직자가 안수받을 때 머리 꼭대기의 머리칼 전부를 깎고 머리 주위로 머리칼을 조금만 남겨두는 채발 의식)을 도입했으나 차츰 아일랜드 고유의 이방적 풍습을 따라 전멸 채발(frontal tonsure; 양 귀를 연결하는 선으로부터 앞 부분의 머리를 전부 깎는 채발 의식)을 인정하여 사용하게 했으니 이 전면 채발은 아일랜드 기독교의 특징의 하나가 되었다. 아일랜드의 켈틱 기독교는 로마 기독교에 비해 더 엄격한 수도원적 신앙 생활과 학문 연구 및 전도(선교)를 강조하는 ‘토착 기독교’로 발전해 갔다.

“대결적 및 순교적 선교”

패트릭이 복음 전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가능한 모든 필요한 방법을 다 활용한 ‘적응식’ 방법을 채용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안일한’ 방법이나 ‘절충식’ 선교 방식을 채택하지는 않았다. 그는 항상 환란과 죽음의 위협을 받고 있었으며 이교적 신앙과는 항상 대결하고 있었다. “나는 너희들 가운데와 그리고 여러 곳으로 여행하며 많은 위험을 무릅썼다. 나는 군주들에게 선물을 바치기도 했으나, 그들은 나와 나의 동료들을 체포했고 나를 죽이려고까지 했다. 우리들이 가지고 있던 것 전부를 약탈했고 나에게 수갑을 채웠다.” (참회록, 51-52장).

패트릭은 미트주에 머무는 동안 이교 승려들 즉 드루드(druids)의 마술을 깨뜨림으로 자기가 아일랜드의 승려들보다 우세함을 과시했으며, 마요(Mayo)주로 전도 여행을 가는 길에는 카반(Cavan)주를 지나면서 크롬 크루아이크(Crom Cruaich)라는 거대한 돌 우상을 깨뜨려 부수기도 했다.

패트릭은 미트주의 복음화를 마친 후 멀리 서해안 마요주로 갔다. 그곳은 오래전 꿈 속에서 ‘아일랜드 사람의 소리’가 들려 오던 보클루트(Voclut) 숲이 있는 곳이었다. 패트릭은 그곳에 7년동안 머물면서 마요주 복음화에 전력을 다했다. 패트릭은 443년경 다시 동부로 돌아왔다. 그곳의 군주 데어(Daire)의 환심을 사게 되고 그는 아마즈(Armagh)에 있는 토지를 패트릭에게 선물로 주었다.

여기에 교회와 수도원을 세웠는데 아마즈 수도원은 그 후 아일랜드 기독교의 중심지가 되었다. 패트릭은 그의 말년을 주로 이곳에 머물면서 선교하다가, 457년경 아마즈 감독의 자리를 그의 제자 베니누스(Benignus)에 물려주고 자기는 솔(Saul)로 은퇴했다. 아일랜드의 복음화를 위해 일생을 바친 성 패트릭은 461년경 세상을 떠나 그의 선교지인 아일랜드 땅 도운(Down)주 동부에 있는 다운패트릭(Downpatric)에 묻혔다.

패트릭은 선교의 소명과 열의에 불타는 헌신적인 사람이었고 원수의 나라에 찾아가서 위험에 굴하지 않고 끈질긴 정열을 가지고 자기의 전 생애를 불사른 사랑의 사도였다. 그는 또한 사도 바울처럼 자기의 모든 수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았음을 절감하여 자기 자신을 도무지 자랑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의 약함을 자랑한 겸손의 사람이었다.

“죄인이요 가장 무식한 사람인 나 패트릭은 아일랜드의 감독임을 선언한다.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임을 더욱 더 확실히 믿고 있다.” (코로티쿠스 병사들에게 보내는 서한, 서문). 패트릭의 생애를 통하여 많은 이적과 놀라운 일들이 일어났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으나, 패트릭 자신은 그의 「참회록」에서 이적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고 (손양원 목사님처럼)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만을 높이며 다음과 같이 끝을 맺었다.

“내가 기도하기는 죄인이요 가장 무식한(rusticissimus)사람인 패트릭이 아일랜드에서 쓴 이 글을 읽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모든 사람들이 내가 어떤 조그만 일을 하나님의 뜻대로 이룩했다면 그것이 나의 무지와 무능으로 되어진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의 선물로 되어진 것을 참으로 믿기를 바라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죽기 전에 하고 싶은 고백(Confession)이다.” (참회록, 결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