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눈물을 폭포수처럼 쏟으면서 주님의 품으로 돌아온 ‘참회’의 어거스틴(386년 8월)! 세례를 받아 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으로 태어난 ‘환희’에 넘친 어거스틴(387년 4월)! 그는 388년 고향 칼타고로 돌아왔다. 하나님의 종으로 동족들을 섬기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가 가장 사랑하던 아들과 친구를 잃는 슬픔을 경험했으나 그 슬픔은 그로 하여금 주님과 동족을 위해서 온 몸을 불사르는 헌신의 삶을 살게 만들었다. 그는 3년 후인 391년 새로운 신자들과 제자들을 찾으려고 아프리카에서 두 번째로 큰 역사적인 항구 도시인 히포로 왔다.


“히포의 감독”

어거스틴은 396년 히포(Hippo)의 감독으로 선출됐다. 감독으로 선출되기를 원하지 않았지만 할 수 없이 주인이신 하나님을 거스를 수 없어 감독으로 선출된 것이었다. 어거스틴이 히포에 도착하여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36년 후 교인들에게 말했다.

“여러분이 보시다시피 하나님의 은혜로 감독이 된 나는 여러분 중에 많은 분들이 아시는 대로 이 도시에 올 때는 청년이었습니다. 나는 수도원을 세울 장소를 찾고 있었습니다. 거기서 나의 형제들과 같이 살기 위해서였지요. 나는 이 세상에서 모든 희망을 포기했었습니다. 내가 어떤 인물이 될 수도 있었지만,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현재 감독직에 있습니다만 감독이 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죄인들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집에서 초라하게 살기를 원했습니다. 나는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끊었습니다. 나는 내가 교인들을 다스리는 자들과 동등한 인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성찬식에서 나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 않았습니다. 낮은 자리, 구석진 자리를 선택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일어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감독직을 두려워했습니다. 나의 명성이 하나님의 종들 사이에 퍼지면서부터 나는 감독이 공석인 지역으로는 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행여나 감독으로 뽑힐까 두려웠기 때문입니다. 나는 감독이 되지 않으려고 단단히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높은 직책에 위험하게 있는 것보다 낮은 자리에서 구원 얻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 말씀드린 대로 종이 그 주인을 거스를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이 도시에 들어올 때 친구를 만나 그를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수도원에서 함께 살고 싶었습니다. 나는 마음이 놓였습니다. 이미 감독이 있는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꼼짝없이 잡혀서 신부가 되었습니다… 그 후 신부의 자리에서 여러분의 감독이 되었습니다.” (설교, 355권 2장).

어거스틴은 설교와 목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그의 감독 저택을 중심으로 수도원 운동을 일으켰다. 그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는데 어거스틴은 그들에게 가난과 독신의 생활을 할 것을 서약하게 했고 엄격한 규칙생활을 하게 했다. 그리고 그들에게 성경만을 가르쳤다. 그 당시 사회는 사치와 낭비가 심했는데 어거스틴은 가난한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구제를 강조했다. 가난한 자들을 위한 잔치를 베풀기도 했고 방문자들을 친절하게 대접하기도 했다.

어거스틴은 때로 부자들을 향해 설교를 하기도 했다. 그는 엄격한 수도원 규칙을 만들었다. 채식을 하게 했고 여자들이 남자 수도원을 방문하는 것을 엄격히 금했다. 어거스틴은 의인 아벨이 죄를 범했을 수 있었다면 무슨 죄를 범했을까 생각해 보았다. 그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아마 너무 크게 가슴을 흔들며 웃었던지, 자기를 잊고 너무 장난을 쳤던지, 사과를 너무 많이 먹었던지 그래서 너무 많이 먹고 소화불량에 걸렸던지 그런 일들이었을 것이다” (자연과 은총, 38권 4장). 그러나 어거스틴의 수도원이 애굽의 수도원처럼 지나친 금욕주의로 흐르지는 않았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책을 읽고 연구를 하고 그리고 학문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점점 많이 몰려들어 더 큰 집을 지어야만 했다. 남자 수도사들이나 여자 수녀들을 모두 하나님의 종들(servants of God)이라고 불렀다.

어거스틴은 히포에서 수도원 운동뿐 아니라 저술과 신학 활동을 하면서 76세가 되던 430년까지 34년간 하나의 ‘포괄적인’ 기독교 진리의 체계를 수립했다. 그는 여러가지 이단들과 극단적 기독교 사상들과 싸우며 하나의 ‘포괄적인’ 복음적 기독교 진리 체계를 수립하는 등 기독교계에 위대한 공헌을 했다. 그가 평생 싸워야 했던 이단은 마니주의와 도나티스트주의와 펠라기안주의였다.

어거스틴은 마니주의와 싸우면서 모든 피조물이 본질적으로 선하다는 것을 주장했다. 그는 이미 392년 8월 그의 옛 친구 마니교도 포투나투스(Fortunatus)와 공중 목욕탕 홀에서 공식논쟁을 벌였다. 많은 청중 앞에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나는 과거에 진리라고 생각했던 것을 지금은 오류라고 생각합니다. 내 의견이 옳은지 그른지 당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결국 어거스틴은 포투나투스를 할 말이 없는 지경까지 몰아세웠다. 포투나투스는 영원히 그 도시를 떠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섭리자이심을 강조했다. 악은 선의 결핍이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악은 어떤 절대 악으로부터 비롯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자유 의지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도나티스트 분파운동과 싸우면서 교회론과 성례론을 정립했다. 어거스틴은 이미 394년에 “도나티스트 반박의 ABC”란 노래를 만들어 그들을 비판했다. 그 노래는 단순한 음률에 맞춘 노래로서 매 절이 알파벳 글자로 시작하여 다음과 같은 후렴귀로 끝났다. “평안을 기뻐하는 너희여 지금은 무엇이 옳은지 판단할 때로다.” 어거스틴은 교회의 보편 일체성(one)과 함께 거룩성(holy)을 강조하면서 동시에 교회 안에는 선한 사람들과 악한 사람들이 섞여 있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또한 펠라기안주의와 싸우면서 인간의 전적 타락과 아울러 하나님의 전적 은총을 강조하는 은총론을 전개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초자연적 은사를 부여 받아 창조되었으나 타락함으로 그 은사를 상실했다고 했다. 인간은 아담의 죄의 유전을 받아 전적으로 타락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로만 구원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 점에서 어거스틴은 하나님의 예정을 강조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예정과 은총에 관한 어거스틴의 견해는 후에 종교 개혁자들 특히 칼빈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