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기독교적 한거 생활과 세례”


개종 후인 386년 여름에 어거스틴은 가슴에 병을 앓게 됐다. 그 “가슴의 병”이 천식이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음성도 변했고 웅변가로서의 일을 계속할 수 없게 됐다. 어거스틴이 기술한 대로 가슴은 교만의 안식처로 상징하는데 그 교만의 처소를 내리치는 고통을 당한 것이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6년 9월 카시키아쿰(Cassiciacum)이란 시골로 내려가 소위 “기독교적 한거 생활”을 시작했다. 눈 덮인 알프스가 멀리 보이고 연못과 숲에 둘러 쌓인 카시키아쿰의 별장은 어거스틴에게 휴식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의 장소를 제공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6개월간 어머니 모니카와 아들 아데오다투스(‘신의 선물’), 친구 알리피우스, 그리고 그의 제자 리켄티우스 등과 함께 명상과 기도와 대화와 저술에 종사했다.

어거스틴은 386년 9월부터 이듬해 2월까지 네 권의 책을 저술했다. 「신학파 반박」,「행복한 생활」,「질서론」,「독백론」을 저술했다. 「독백론」(Soliloquia)은 어거스틴과 이성과 대화의 형식으로 저술되었는데 실상은 자기 자신과의 대화였다. 어거스틴은 「독백론」을 긴 기도로 시작했는데 그는 여기서 하나님과 자신을 ‘알기를’ 소원하며 믿음으로 받아드린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기를’ 소원했다. 하나님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믿어야 하되, 믿음으로 받아드린 하나님에 관한 신앙의 조항들을 이성으로 ‘이해하려는’ 어거스틴의 신학활동이 바로 여기 카시키아쿰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어거스틴은 387년 3월 아데오다투스와 알리피우스와 함께 밀란으로 돌아왔다. 세례를 받을 준비를 하기 위해서였다. 3월 10일 사순절이 시작되는 날부터 세례 지원자들에 대한 암브로스 감독의 엄숙한 교육이 실시되었다. 감독은 주기도문을 가르쳤고 다신론과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엄중한 경고를 했다. 또한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취하신 방법과 불신자들이 받을 사후 형벌에 대해서도 가르쳤다.

고난주간에 들어서면서 어거스틴의 가슴은 설레였다. 4월 22일 목요일이 되자 그날 밤부터 목욕을 금하고 금식에 들어갔다. 토요일에 어거스틴은 성당으로 돌아와 암브로스 감독이 베푸는 축사 안수기도를 받았다. 사탄을 거부하고 자기 일을 거부하고 허영을 거부할 것을 서약했다. 그리고 나서 성부 성자 성령을 믿느냐는 감독의 질문에 어거스틴은 “나는 믿습니다”라고 엄숙하게 대답했다.

부활주일 전야, 4월 24일 밤 어거스틴과 다른 남녀노소의 세례 지원자들은 암브로스 성당의 본당 옆에 있는 세례관으로 갔다. 어거스틴은 커튼 뒤로 가서 알몸으로 깊은 물속으로 내려갔다. 옷을 완전히 벗은 것은 세속적인 것을 전적으로 거부하는 것을 상징했다. 암브로스는 세 번 세차게 솟구치는 물속으로 그의 어깨를 밀어 넣었다. 후에 그는 깨끗한 흰 옷을 입고 촛불이 밝게 켜진 본당으로 들어갔다. 그와 그의 동료 새 신자들은 회중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약간 높은 좌석에 앉았다. 그것은 제단 곁에 있는 것으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신비에 최초로 참여하기 위한 것이었다.“옛 사람을 벗고 새 사람을 입는다”는 주제, 중생과 부활의 주제, 그리스도의 지상강림으로 인한 영혼의 천국 승천의 주제들이 어거스틴의 머리 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387년 4월 25일 부활 주일은 어거스틴의 생애에서 잊지 못할 거룩한 날이 되었다.

“오스티아에서의 이별”

어거스틴은 이제 새로운 존재가 되었다. 그는 아프리카로 돌아가 그곳에서 주님을 섬기기를 뜨겁게 소원했다. 그러나 어머니 모니카의 건강이 악화되고 있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387년 가을 밀란을 떠나 로마를 거쳐 항구 도시 오스티아(Ostia)에 도착했다.

그러나 그때 찬탈자 막시무스의 함대가 로마의 항구들을 봉쇄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거스틴의 일행은 며칠 동안 오스티아에 머물 수 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어거스틴은 어머니와 깊은 영적 교제를 나누었다. “우리는 정원을 바라보는 창 문턱에 기댄 체 조용히 서 있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말을 주고 받았습니다. 어머니와 나 둘이서만 그윽한 기쁨을 나누며…. 그리고 우리가 ‘그분의 지혜’를 얘기하면서 그것을 헐떡거리며 사모하고 있을 때 우리는 진심을 기울여 그것을 붙잡았습니다. 우리는 육체의 어떤 소리도 아니요 천사의 소리도 아니요 천둥 소리도 아니요 비유의 어두운 의미도 아닌 바로 그 분의 음성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 분의 음성만을” (참회록 9권 10장 23-25절).

그로부터 보름 이내에 모니카는 세상을 떠났다. 9일간 병상 생활을 하는 동안 모니카는 간혹 눈을 떠서 자기 아들을 축복하고, 어거스틴에게서는 평생 싫은 소리 한번 듣지 않았다고 말하고, 나비기우스(Navigius)에겐 이제는 남편 파트리키우스 곁의 고향 땅에 묻히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나는 내 손으로 어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측량할 수 없는 슬픔에 가슴이 매였습니다. 하마터면 눈물이 펑펑 쏟아질 뻔 했습니다. 모친이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 내 아들 아데오다투스는 통곡했습니다. 나는 이제 모친이 주는 커다란 위로를 잃고 말았습니다. 때문에 내 영혼은 상처를 입고 내 생활은 갈기갈기 찢어졌습니다. 과거에는 모친과 내가 한데 엉킨 생활이었기에… 아데오다투스가 진정하고 울음을 그쳤을 때 에보디우스(Evodius)는 시편 찬가를 들어 노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온 식구들이 화답하며 찬양했습니다. 한쪽에서 장례식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친구들과 이런 저런 말을 주고 받고 있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1절).

“모친의 시신을 매장하던 날, 나는 눈물없이 장지를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날 종일 속으로 무거운 슬픔을 참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주님께 내 고통을 치유해 주시기를 간구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치유해 주시지 않았습니다. 문득 목욕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의 이 비통한 슬픔이 마음 밖으로 땀 방울처럼 흘러나오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잠을 잤습니다. 그러나 깨고 나니 조금도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그런 뒤에 나는 차차 조금씩 주님의 여종에 대한 과거의 감정을 회복하기 시작했습니다. 모친이 주님과 대화할 때 얼마나 경건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모친이 나와 대화할 때 얼마나 부드럽고 자상하셨는지를 기억했습니다. 그런 기억을 되살리면서 주님으로부터 위로를 얻었습니다.” (참회록 9권 12장 32-35절).

그리하여 모니카는 오스티아에 묻혔다. 어거스틴과 에보디우스는 로마로 돌아가서 항만 봉쇄령이 철회될 때까지 기다리다가 388년 말에 아프리카의 칼타고로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