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

내가 교회사를 전공할 수 있었고 특히 어거스틴을 전공할 수 있었던 것은 나의 학문과 사역과 인생과 관련하여 나에게 주어진 가장 큰 축복이었다.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균형 잡힌’ 시각과 ‘양면성적’ 사고를 나에게 가져다 주었기 때문이다. 지난번 어거스틴의 ‘출생과 소년시절’ ‘청소년 시절’에 대해서 살펴보았고 어거스틴이 마니교의 함정에 빠져서 9년 동안 (373-382) ‘마니교의 추종자’로 지냈다는 이야기를 했다.


"로마와 밀란으로"

어거스틴은 382년에 칼타고를 떠나야만 했다. 그는 마니교에 환멸을 느꼈고 칼타고에서 난폭한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싫증이 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이 무렵 로마에 있는 어거스틴의 가까운 친구들이 어거스틴에게 ‘더 나은 수입’과 ‘더 높은 명예’를 약속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어거스틴이 볼 때 로마의 학생들은 훈련이 잘 된 학생들처럼 보였다. 어거스틴이 로마로 가고자 할 때 어머니 모니카를 고려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실로 내가 떠나간다는 말을 듣고 죽음과 같은 괴로움에 사로잡혀 해변까지 나를 따라 오셨습니다. 어머니는 나를 부여잡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든지 로마로 가려면 같이 가든지 하자고 애걸하셨습니다. 그러나 나는 나의 친구가 안전하게 항구를 떠나는 것을 전송해야겠다는 구실을 들어서 어머니를 속였습니다. 나는 이렇게 나의 어머니에게 거짓말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분이 어떤 어머니이신데!... 어머니는 나 없이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으시겠다고 하셨지만 나는 어머니를 간신히 설득시켜 그 근처에서 밤을 지내시도록 하였습니다. 거기에는 마침 성 키프리안(St. Cyprian)을 추모하는 강연회가 있었습니다. 바로 그날 밤 나는 어머니 품을 빠져 나왔습니다. 어머니는 계속 기도하시면서 우셨습니다… 바람이 불어 돛을 때렸습니다. 해변이 시야에서 사라져 갔습니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고향으로, 나는 로마로 가게 된 것이었습니다.” (참회록, 5권 8장 15절).

어거스틴은 ‘영원한 도시’ 로마에서 불행한 한 해를 보냈다. 그는 도착하자마자 위험한 질병에 걸렸다. 그는 「참회록」에서 몹시 괴로운 어투로 그 질병을 어머니 모니카를 버린 죄 값으로 온 ‘질병의 채찍’이라고 했다. 로마에 있는 학생들에게는 스승들을 속이는 습관까지 있었다. 그러나 어거스틴이 완전한 절망에 빠지지는 않았다. 그 해 말에 그는 시마쿠스(Symmachus)의 관심을 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로마의 장관(Prefect)이었던 시마쿠스가 밀란 황제의 궁전으로 보낼 수사학 교수 한 사람을 선택하도록 황제의 명령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중요한 지위였다. 시마쿠스는 이 중요한 직책을 위하여 어거스틴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것은 어거스틴이 시마쿠스 앞에서 너무나 훌륭한 연설을 해 보였기 때문이었고 마니교에 몸담고 있는 시마쿠스의 친구들이 마니교도를 그 직책에 세워줄 것을 요구해 왔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로마의 마니교도들은 시마쿠스와 같은 이교도와 함께 카톨릭 교회의 세력에 대항하고 있었다. 384년 가을 이교도의 대표격인 시마쿠스가 그러한 중요한 지위에 어거스틴과 같은 반 카톨릭교도를 세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 해 초에 그는 황제에게 진정서를 제출한 적이 있었다. 황제가 수 년 전에 로마의 전통적 이교를 폐지하겠다는 결정을 내렸었는데 그 결정을 취소해줄 것을 요구한 진정서였다. 시마쿠스의 진정은 이교에 대하여 관용을 보여 주도록 요구하는 내용이었다. “사람이 그토록 위대한 신비(Mystery)에 도달하는 데는 오직 한 길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의 이러한 진정은 암브로스의 맹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암브로스는 밀란의 감독으로서 바로 궁중 세력을 조종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소년 황제 발렌티니안 2세에게 직접 편지하기를 황제가 어릴 때 카톨릭교회의 세례 지원자였던 사실을 상기시키며 여러 나라의 신들은 악마들이라고 말하면서 만일 황제가 시마쿠스의 진정을 받아들인다면 황제의 교회 출석 권을 박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결국 시마쿠스는 전통 종교에 대한 과격한 푸대접에 격분한 나머지 어거스틴과 같은 사람을 내세워 황제 앞에서 말할 수 있는 대변자로 만드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었다. 시마쿠스가 본 어거스틴는 철저하게 반 카톨릭적인 종파의 한 교도이었다.

결국 어거스틴은 시마쿠스의 천거를 받아 384년 밀란으로 갔다.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밀란은 새로운 관심과 새로운 지식과 새로운 성공의 기회를 의미했다. 한 해 동안 그는 정력과 야망에 불타서 그러한 생활 속으로 투신했었다. 그러나 결국 밀란은 그에게 있어서 그 중심에 암브로스를 담고 있는 상징적인 도시가 되었다. 그의 참회록을 보면 카르타고는 그에게 있어서 정욕의 ‘가마솥’이었고 밀란은 카르타고와는 대조적으로 그 자체의 독특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내가 밀란으로 온 것은 바로 암브로스 감독에게 온 것 이었다.” (참회록, 5권 13장 23절). 이 한 마디 말 속에는 깊은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요소와 환경에 의해서 떠밀려 다니지만 결국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 안에 있다는 것이다.

384년 가을 밀란에 도착한 어거스틴은 환멸에 빠져 있었다. 과거에 확신하던 것들이 여지없이 무너져 버렸기 때문이었다. 환멸과 절망도 때론 필요하다. 이런 형편에서 그는 다시 한번 시세로의 책을 읽게 되었다. 시세로는 철학적인 대화의 형식으로 ‘신학파’(New Academy)의 ‘회의주의’를 소개해 놓았었다. 회의주의자들인 신학파는 우주의 본질에 관한 지식이 쉽게 획득될 수 없다고 했다. 어거스틴은 회의주의를 통하여 ‘지혜’야말로 오랜 세월을 두고 추구해야 할 것임을 깨달았다. 마니교는 어거스틴에게 ‘이미 만들어진’ 지혜를 제시해 주었으나 이제 어거스틴은 지혜는 필생의 철학 훈련을 통하여 추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경우에 따라 그릇된 견해들을 부단히 거부하면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는 회의주의의 입장에 매력을 느끼게 되었던 것이었다. 일단 지혜를 부단한 추구 과정으로 깨달은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또 다시 문제가 되는 것은 어떻게 추구할 것이냐 하는 점이었다. ‘신학파’에 의하면 인간의 마음으로는 평생 진리를 발견하지 못할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 기간 동안에 진리에 이르는 다른 하나의 길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는데, 진리에 이르는 길을 가리켜 주는 “권위”(authority)가 있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어거스틴이 밀란 교회의 세례 준비자(catechumen)가 되기로 쉽게 결심한 것도 이런 관점에서 보아야 할 것이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담임,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회장)